[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우리나라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주도권 싸움에 끼어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등에 업고 '메모리 반도체 강국'을 강점으로 내세웠던 것이 지금은 되레 상황을 난감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단 분석이다. 특히 일본이 미국과 손을 잡으면서 우리나라 정부뿐 아니라 중국에 공장을 둔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장기적으로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양국의 반도체 패권 전쟁은 이달 중순 미국 마이크론에 대한 중국의 제재를 기점으로 점차 격화되고 있다. 앞서 미국이 중국으로 반도체 기술과 장비 수출을 금지하자,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중국은 '안보 심사' 결과를 내세워 마이크론 제재에 나섰다.
마이크론의 중국 내 점유율은 지난해 기준 D램이 14.5%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이어 3위에 올랐다. 낸드플래시 점유율은 4.6%로 6위다. 마이크론 전체 매출에서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11%로, 중국 내 고객 대부분은 중국 국적이 아닌 회사다.
이 탓에 중국이 마이크론 반도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제재는 사실상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른바 '칩4 동맹'을 추진하며 시작된 반도체 패권 경쟁을 더 부추기게 됐다는 점에서 이번 일의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는 미중 반도체 전쟁이 시작된 이후 중국의 첫 반격"이라며 "미국, 중국 모두 반도체 산업 핵심 시장인데다 주요 파트너란 점에서 우리나라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고 말했다.
◆中 마이크론 제재 후 반도체 패권 전쟁 '격화'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부터 바이든 행정부까지 중국 반도체 기업을 향해 연일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로 인해 화웨이, SMIC, YMTC 등은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나아가 미국은 '파운드리 1위' TSMC 보유국인 대만을 비롯해 일본, 네덜란드 등까지 중국 제재 움직임에 끌어들이면서 연일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중국이 마이크론 제재에 나서자 5일 만에 경고에 나서기도 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지난 27일(현지시각)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장관급 회의에서 "명백한 경제적인 강압으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중국이 마이크론 제재 이유로 "심각한 네트워크 보안 위험이 있었다"고 발표하자, 미국은 "근거가 없는 제한"이라고 즉각 반발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미국이 강경한 태도로 나서자 중국은 둘 사이에 낀 우리나라로 고개를 돌렸다. 일방적으로 우리나라가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과 협력키로 했다고 발표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 상무부는 최근 안덕근 한국 통상교섭본부장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의 회담을 언급하며 "양측은 반도체 산업망과 공급망 영역에서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 산업통상자원부는 반도체에 대한 언급 없이 "중국 측에 교역 원활화와 핵심 원자재 및 부품 수급 안정화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고 말하며 부랴부랴 선을 그었다.
어느 한 쪽의 편도 들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미국 측의 노골적인 강압도 받고 있다. 특히 공화당 소속 미 하원의 마이크 갤러거 미중전략경쟁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상무부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미국의 수출 허가가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채우는데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최근 몇 년간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직접 경험한 동맹국인 한국도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나섰다.
◆'양자택일' 상황서 美·中 눈치만 보는 韓…日 존재감 급부상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들은 갈팡질팡 하는 모양새다. 글로벌 경제와 반도체 기술 패권을 쥔 미국의 움직임에 동참하는 듯 한 움직임이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 공장을 두고 있는 데다 중국이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이란 점에서 신경을 안쓸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D램 40%, 낸드플래시 20%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올해 1분기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삼성전자의 경우 2014년 이후 처음으로 20% 아래로 떨어진 18.8%, SK하이닉스는 30.4%를 기록했다.
일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오는 10월 만료되는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한 미국의 조치에 '1년 유예' 처우를 받았지만, 미국의 압박 수위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어 답답한 상태에 놓였다. 우리나라 정부도 최근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웨이퍼 투입량을 5%에서 10%로 늘려 달라고 요구하는 등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중국 사업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방안 마련에 나섰지만 미국이 이를 수용할 지는 미지수다.
앞서 미국은 지난 3월 반도체법에 따른 이른바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을 공개하며 미국의 보조금을 받으면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 등에서 현행 대비 첨단 반도체의 경우 5%, 범용 반도체는 10% 이상의 생산능력 확대를 제한키로 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국이 불편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며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에 대한 노출도가 크기 때문에 미국에서 오는 모든 압박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봤다.
일각에선 우리나라 정부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뚜렷한 대응 전략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미국 편을 든 일본이 장기적으로 수혜를 입게 될 것이란 분석을 내놨다.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강점을 가진 일본을 미국이 밀어주게 될 경우 우리나라 기업들의 타격은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했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반도체 시장에서 우리나라를 배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단 점에서 양국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두고 기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정부가 노선 정리에 확실히 나서지 않으면 그 피해는 기업들이 보게 될 것"이라며 "머뭇거리는 사이 미국이 일본을 주요 파트너로 선택하게 되면, 우리나라가 한 순간에 일본에 역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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