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조석근 기자] 일본 정부가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의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를 본격화했다. 한국 전체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생산라인에서 일본산 점유율이 높은 소재만 콕 집은 '정밀 타격'이다.
그러나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의 글로벌 위상을 감안하면 일본 소재업체들의 피해도 만만찮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더구나 일본의 수출 규제가 장기화할 경우 미·중은 물론 스마트폰, 노트북, PC 등 해외 각 완성품 업체들의 부품 수급까지 영향을 줄 수 있어 이번 수출 규제가 아베 정부의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1일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종의 소재의 한국 수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방침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국내 기업들이 이 소재들을 수입할 경우 종전과 달리 일본 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 데다 심사과정에 90일가량이 소요될 수 있어 공급이 지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을 수출입 우대국으로 분류, 이같은 절차에서 면제 대상으로 간주했다. 오는 8월부터는 이같은 '화이트 리스트' 27개국에서 한국을 배제해 첨단소재 수출 규제를 전면적으로 강화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이번에 직접적인 수출 규제 대상으로 거론된 감광액과 에칭가스의 경우 반도체 제조공정의 핵심소재다. 실리콘 웨이퍼 원판에 반도체 회로도를 프린팅하는 과정에 사용되는 물질이 감광액, 프린트된 회로도를 따라 회로를 새기는 데 사용되는 물질이 고순도 불화수소(불산가스)다. 스미토모, 신예츠, 스텔라, 모리타 등 일본 업체들이 90% 이상 세계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경우 휘어질 수 있는 '플렉서블' OLED 디스플레이 패널의 핵심 소재다. 고사양 스마트폰, TV 화면에 필수적인 소재로 일본 스미토모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분야다. 국내 수출 전체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일본 업체들의 비중이 절대적인 첨단소재 분야에 제재를 내린 셈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생산라인의 특성상 수백개 공정 중 단 하나만 정지해도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하다"며 "삼성전자 반도체·디스플레이 사업부와 SK하이닉스를 직접 겨냥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해당 소재의 한국 수출을 허가하더라도 심사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는 점도 업계의 골칫거리다. 감광액과 불산가스의 경우 고순도 화합물이다 보니 유통기간 문제로 심사에 소요되는 시일상 품질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다른 관계자는 "재고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다고 해도 보관 문제로 무한정 늘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 망신' 아베 정부, 韓 수출 규제도 오래 못간다?
일본 정부가 이같은 수출 규제를 도입하는 명목상의 이유는 한국 대법원의 일본 전범기업들에 대한 강제징용 희생자 배상 판결이다. 지난해 10월 당시 판결부터 일본 정부가 보복조치를 거론한 가운데 8개월 만에 구체적 행동이 나온 셈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 정부가 처한 외교적 상황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아베 정부는 연달아 국제외교에서 고립을 자초한 상황이다. 단적으로 지난달 13일 이란과의 정상회담 중 일본 유조선이 피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악화일로인 미국과 이란의 관계를 '중재' 한다는 취지의 정상회담 명분과 달리 엉뚱하게 아베 총리 본인이 국제분쟁에 휘말린 셈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5월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방일 당시 자국에서도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이 나올 만큼 트럼프 대통령을 각별히 접대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의 대일 무역불균형, 미일 안보조약 불평등 해소라는 답변만 얻은 데다 최근 G20 정상회담에선 주최국임에도 불구, 미중 무역분쟁 담판과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담에선 철저히 소외되는 모양새만 연출했다.
일본은 오는 21일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아베 정부의 최근 잇다른 외교적 실책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징용 판결을 빌미로 한국을 대상, 초강경 수출 규제 카드를 꺼내든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정작 아베 정부의 이같은 조치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도 나온다. 무엇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의 국제적 위상 때문이다.
삼성과 SK하이닉스의 지난해 4분기 기준 메모리 시장 점유율 세계 60%에 달한다. 삼성·LG디스플레이 등 모바일, TV 디스플레이 패널 시장 점유율도 20% 이상으로 세계 최대 업체들이다. 일본 소재업체들의 최대 공급처인 만큼 일본측 피해도 만만찮다는 얘기다.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체들의 납품 지연 시 글로벌 스마트폰, 노트북, PC 등 IT 완성품 업체들의 생산도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된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스마트폰, TV 업체들은 물론 애플, 델 등 세트업체와 구글 등 데이터센터도 피해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유진투자증권 이승우 애널리스트는 "미중이 간신히 봉합한 무역갈등 문제를 미국의 눈치를 보는 아베 정부가 짊어질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분석했다.
KTB투자증권 김양재 애널리스트는 "정작 이번 수출 규제 조치로 일본 업체들의 반사이익이 부재하다"며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과잉 재고를 소진하고 생산차질을 빌미로 가격 협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조석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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