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수기자]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를 입어도 괜찮은 회사가 있다. 임직원간 격식을 허물기 위해 직급을 없애고 '님'으로 호칭을 통일하는 회사도 있다. 직원들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각종 보육 시설을 만든 회사도 있다. 모두 게임업계 얘기다.
게임업계에서는 어떤 산업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유로움을 찾아볼 수 있다. 다수의 게임사들이 밀집한 경기도 판교에는 형형색색의 복장을 한 사람들을 다수 접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넥타이와 수트 차림이 되레 어색하게 보일 때가 많다. 시커먼 수트 차림의 샐러리맨이 많은 여의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인 셈이다.
이는 창의력이 중요한 게임산업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풍경이다. 국내 게임사들은 기상천외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눈에 보이는 게임으로 구현하기 위한 환경 제공에 노력하고 있다. 복장 자율화, 직급 폐지, 탄력적 출퇴근 제도 등을 시행하는가 하면 부서에 국한되지 않고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명사 특강 등 인재 육성을 위한 다채로운 시도도 전개하고 있다. 모두 경직된 조직 문화를 타파하고 누구나 아이디어를 낼 수 있기 위한 여건 마련을 위한 취지다.
◆'님' 문화 정착한 게임산업…창의적 여건 낸다
'던전앤파이터' '히트'로 유명한 넥슨의 박지원 대표는 임직원들에게 존칭을 쓴다. 업무상 이메일을 보낼 때도 직급이나 직책 대신 '○○○'님으로 통일한다. 신입사원이 박 대표에게 메일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넥슨은 직원들이 직급을 막론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수평적 호칭 문화를 도입했다.
지난해 연매출 1조원을 달성하며 이목을 끈 넷마블게임즈 방준혁 이사회 의장도 회사에서는 '방준혁님'이라고 불린다. '모두의마블' '세븐나이츠'를 서비스 중인 넷마블게임즈 역시 수평적 의사 과정을 위해 지난해 10월 전사적으로 '님' 문화를 도입한 데 이어 올해 1월에는 직급 체제를 모두 없앴다.
영어 이름을 도입한 사례도 있다. 최근 자체 게임 조직을 꾸린 카카오의 경우 설립 초기부터 영어 호칭을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카카오 김범수 의장은 브라이언(Brian), 임지훈 대표는 지미(Jimmy)로 불린다. 이러한 영문 호칭은 수평 문화를 굳건히 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리그오브레전드'로 유명한 라이엇게임즈 역시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호칭한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라이엇게임즈는 수직적 의사소통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본사(head office)는 '센트럴(central)'로, 지사(branch)는 '로컬(local)'로 부르는 문화를 갖고 있다.
이처럼 게임업계에서는 부장님·차장님이라는 호칭을 내부에서 듣기 어려운 편이다. 쓰더라도 대외적인 호칭일 뿐 내부에서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임사들은 임직원들이 직급을 막론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수평적인 호칭 문화를 도입하는 모습이다.
권위적이고 보수적 성향의 기존 산업군이 수평적 호칭 문화를 도입하기 애를 먹는 것과 달리, 젊고 자유로운 게임업계는 이러한 호칭 문화가 익숙하게 스며들고 있다.
◆창의적 개발 위해 이색 시스템 도입
게임사들은 이같은 수평적 의사소통 외에도 보다 창의적인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시스템도 속속 갖춰가고 있다.
'애니팡'으로 유명한 선데이토즈는 게임의 상품화보다 자율적인 개발 장려를 목적으로 하는 '선토 실험실'을 운영 중이다. 이 조직은 회계 담당자가 게임의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고 디자이너가 게임 프로젝트를 이끄는 등 구성원에 제한이 없다. 이를 통해 만들어진 게임은 임직원 모두가 플레이하고 평가해 출시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다. 지난해 출시된 퍼즐 게임 '상하이 애니팡'이 선토 실험실을 통해 만들어졌다.
넥스트플로어도 개발자들의 아이디어를 발산할 수 있는 '지하연구소'를 지난해 4월 마련했다. 회사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실험성 짙은 게임을 개발할 수 있다.
넥슨은 2014년초 사내 신규개발본부 산하에 '인큐베이션실'을 신설했다. 신규 게임 개발을 희망하는 직원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6개월의 시간 동안 회사로부터 지원받는 구조다. 인큐베이션실에서 내부 기준을 통과한 게임은 정식으로 독립하게 된다.
직원들의 발명 활동을 장려하는 게임사도 있다. 엑스엘게임즈는 임직원의 연구·개발 의욕을 고취시켜 발명 활동을 장려하고 아이디어, 고안, 디자인 등을 특허권·실용신안권·의장권 등 산업재산권으로 권리화 하는 '직무발명 보상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발명자에게 출원에 따른 보상금과 산업재산권 등록에 따른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아이디어에 따라 회사에 수익이 발생할 경우 별도의 사업화 보상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리니지'로 유명한 엔씨소프트는 2013년 경기도 판교에 지하 5층, 지상 12층 규모의 R&D센터를 세웠다. 엔씨소프트의 N과 C를 본따 설계된 이 사옥은 창의적인 공동 작업을 이루는 데 주안점을 뒀다. 다양한 콘셉트의 회의실과 접견실, 휴식을 취하고 미팅도 할 수 있는 오픈라운지 등을 마련해 임직원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도 대폭 확대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2013년 7월 말 열린 준공식에서 "엔씨소프트의 게임분야 연구개발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전진적인 기지"라고 말한 바 있다.
◆직원 창의성 올린다 인재 육성 강화
직원들의 창의성 개발을 위한 다양한 특강과 각종 편의 기능을 제공하는 게임사도 많다.
네시삼십삼분은 이달 초 노벨 경제학상 후보인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토리 히긴스(Tory Higgins) 석좌 교수를 초청해 '게임 동기'를 주제로 한 특별 강연을 진행했다. 이 회사는 임직원들의 역량 발전을 위한 명사 강연을 종종 마련한다. 카카오도 직원들의 창의력과 지식을 높여주는 다양한 사내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업무와 관련된 해외 콘퍼런스 참관도 지원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판교 R&D 센터에 전문가 육성을 위한 엔씨유니버시티(NC University)를 운영하기도 했다. 최대 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수용 규모의 세미나홀 등을 통해 직원들은 회사가 마련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넷마블게임즈도 게임업계 최신 트렌드와 글로벌 게임 동향을 분석하는 트렌드포럼을 매주 열고 있다.
임직원간의 교류를 적극 지원하는 회사도 있다. 온라인 게임 '테라'를 만든 블루홀은 매달 한 번 모든 구성원들이 모여 실적, 경영 현황 등의 정보를 공개하고 경영진에게 직접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 자리를 마련한다. 매달 한 번 프로젝트 구성원 모두가 사무실에서 자사 게임을 플레이하고 의견을 교류하는 '테라 플레이 데이'도 연다.
데브시스터즈는 직원들이 폭넓은 분야의 정보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사내 도서 추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공유하고 싶은 책을 추천하면, 회사가 희망자 모두에게 해당 도서를 선물해 업무 관련된 서적 외에도 자기계발, 경제경영, 인문교양, 예술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책을 읽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지식공유문화가 형성됐다.
◆인증받은 게임업계 직원들도 만족
이같은 게임업계의 특성은 각 기관으로부터 '인증'을 받기도 했다. 넥슨은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2014 즐거운 직장, 행복한 기업'에서 문체부 장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라이엇게임즈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에서 발표한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2015년부터 2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 넷마블게임즈는 올해초 고용노동부가 선정한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게임업계 종사자들도 이러한 창의적 환경에 만족도를 드러내고 있다. 채용정보 사이트 잡플래닛에 등록된 이들 게임사 리뷰를 살펴보면 "대기업인데도 불구하고 많이 자유로운 분위기가 참 좋다"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가 최대 장점, 복장 직급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개발자 혹은 기획자가 업무 역량 발휘, 성취감 느끼면서 일할 수 있는 곳" "수평적인 구조라서 높은 직급도 신입들에게 존칭을 써준다" "다양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있어 도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는 회사" 등의 반응이 나온다.
게임사들 역시 이같은 창의적 개발 문화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겠다는 공통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선데이토즈 인사팀 나윤수 팀장은 "자유로운 기획과 개발력으로 만들어진 게임이 임직원들에게 소개되며 선데이토즈의 창조적 실험 문화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데브시스터즈는 "직원들이 획일적으로 담당 부서 및 업무에 제한되지 않도록 조직의 유연성을 추구하고 있다"며 "아이디어에 따라 자유롭게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새로운 프로젝트 업무 기획 및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각자의 책임감을 부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영수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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