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수기자]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최태원 회장이 SK그룹 내에서 맡고 있는 계열사의 모든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최 회장은 SK㈜,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SK C&C 등 4개 계열사의 등기이사를 사퇴하게 된다.
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 역시 SK네트웍스, SK E&S 등 2개 회사의 이사직에서 사임키로 했다.
오너 형제가 모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SK그룹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4일 SK그룹 관계자는 "이사회도 열리기 전에 갑작스러운 결정에 크게 놀랐다"며 "최 회장이 이사직을 사임하더라도 회사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백의종군의 자세로 임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토로했다.
더 큰 문제는 최 회장 형제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지만 이에 대한 뾰족한 대안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날 SK그룹은 최 회장과 최 부회장이 그룹내 계열사의 모든 등기이사직을 내려 놓기로 하고, 이 같은 뜻을 각사 이사회에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회사발전 우선과 도의적인 측면에서 책임을 지고 모든 관계사 등기이사직에서 사임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혀왔다"고 전했다.
SK그룹은 우선 최 회장 형제가 사퇴한 대부분 계열사 등기이사 직에 후임 사내이사를 선임하지 않고, 사외이사 비중을 확대하는 형태로 이사회 중심 경영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사외이사 확충을 통해 투명경영을 강화하는 등 이사회 중심 경영으로 최 회장 형제의 공백을 메운다는 구상이다.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각 계열사별 이사회에서 논의, 최종 확정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따로 또 같이' 집단지성체제 방식의 경영이 한층 더 강화될 전망이다.
SK관계자는 "최 회장은 'SK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중심으로 산하 위원회, 각사 CEO들의 리더십과 8만여 전 구성원들이 수펙스 추구와 한 마음 한 뜻으로 위기를 극복해 고객과 국민들이 사랑하는 SK를 만들어 달라'고 당부해 왔다"고 전했다.
하지만 '오너'로서의 역할까지 전문경영인이 감당하기는 힘들다는 게 재계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그룹의 오너가 장기간 동안 그룹 경영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대규모 투자는 물론 해외 진출과 신사업 발굴 등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위한 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지지는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전문경영인을 통한 일상적인 그룹 경영관리는 가능하다"면서도 "순간의 판단으로 기업의 성패가 좌우되는 글로벌 시장에서 오너의 힘 없이 오랜 기간을 경쟁에서 버텨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포스트 최태원' 찾을까?
등기이사직을 모두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힌 최 회장 형제는 대주주 지위만 유지한 채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문제는 SK그룹에서 현재 불거지고 있는 문제들은 오너 리스크 장기화에 따라 상황이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SK그룹 관계자는 "회장, 부회장의 등기이사 사임에 따른 경영공백은 매우 클 수 밖에 없다"면서 "SK 전 구성원이 비상한 위기 의식을 갖고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놓고 재계에서는 SK가 '포스트 최태원' 체제를 만들지 않겠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그룹의 운영에 있어 오너의 역할은 절대적"이라며 "오너 일가 중 적임자를 찾아 최 회장의 빈자리를 메울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뚜렷한 대안을 찾기 힘들어 보인다. SK그룹은 최 회장 등 오너 일가가 SK C&C를 통해 지주회사인 SK의 지분을 보유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다.
최 회장에 이어 SK C&C의 2대 주주인 여동생 최기원 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은 최 회장을 대신해 경영에 나설 수 있는 여력은 충분하지만, 그룹 경영에 관여한 적이 없어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희박하다.
최 회장의 부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소유 지분이 미미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최 회장의 장녀 윤정씨는 25살, 장남 인근군은 19살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경영참여가 전무해 경영승계 가능성은 아예 논외로 치부된다.
오너공백을 메꾸기 위해 일각에서는 최 회장의 사촌인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의 경영참여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지분이 부족한 최창원 부회장이 그룹 경영의 전면에 나서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 1년간 최 회장 대신 그룹을 이끌어왔던 김창근 의장에게 힘이 실릴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하지만 전문경영인인 김 의장의 활동 영역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전문 경영인이 수조원대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최 회장 형제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만큼,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플랜B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SK그룹은 지난해 초 최 회장의 구속 이후 각종 신규 투자와 해외사업 추진 등이 사실상 '올 스톱' 되는 등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SK그룹이 유공, 한국이동통신, 하이닉스반도체 등의 인수합병(M&A)을 통해 외형과 내실을 다져 온 회사인 점을 감안하면 최 회장의 공백은 곧 성장동력 구심점의 상실을 의미한다.
경기 침체에 따른 업황 악화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실적 역시 추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 회장의 경영공백이 장기화됨에 따라 지난해 그룹의 양대 주력 사업인 에너지·화학의 SK이노베이션과 정보통신의 SK텔레콤 모두 최악의 경영실적을 기록했다. SK네트웍스, SK해운, SK건설 등 다수 계열사들은 실적 악화로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기수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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