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고(故) 이건희 회장 별세 후 처음 진행된 삼성전자의 정기 사장단 인사는 철저한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한 '안정 속 변화'로 귀결된다.
특히 이재용 부회장이 앞으로 젊고 유능한 경영진을 앞세워 미래 먹거리 발굴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이재승 소비자가전(CE)부문 부사장이 삼성전자 최초의 생활가전 출신의 사장 승진자로 이름을 올리고, 반도체를 담당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에서 이정배, 최시영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한 점이 그렇다.
다만, 올 초부터 이어진 코로나19 여파와 사법리스크 등으로 경영 불확실성이 높아진 탓에 변화의 폭은 제한됐다.
그런데도 이 부회장은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도 세대교체를 통한 혁신의 밑그림을 그렸다는 평가다.
2일 발표한 삼성전자 2021년 정기 사장단 인사에서 재계의 기대감이 가장 컸던 부분은 이 부회장의 회장 승진 여부였다. 지난 10월 말 이건희 회장 별세 후 회장직이 공석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이번 승진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도 회장 승진에 관심이 크지 않은 데다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에 경영권 승계 관련 재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것이 부담 요소로 작용해서다. 이 부회장이 다시 등기이사를 맡을 지 여부도 재판 결과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이에 이 부회장은 주요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부회장으로서 또 다시 1년을 보내게 됐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10월 회장직에 오른 후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그룹 중 이 부회장만 유일하게 회장이 아닌 총수다.
이 부회장이 지난 2012년 인사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후 9년간 부회장에 머무르게 되면서 삼성 내부에서는 회장 승진이 빨리 이뤄지길 바라는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이 부회장 영향으로 호실적을 내고 있는 주요 계열사 임원들의 승진에도 차질을 빚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재계 관계자는 "재판 때문에 본인이 인사를 내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듯 하다"며 "이 부회장의 회장 승진은 정기 임원 인사 이후 시차를 두고 별도로 발표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사법리스크·코로나19 여파에 '안정 속 변화' 추구
이번 인사는 사법 리스크 영향으로 인사 폭이 클 것이란 의견들이 일각에서 제기됐지만, 코로나19 등 글로벌 위기 상황을 고려해 '안정'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진행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김기남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부회장)과 김현석 소비자가전(CE)부문 사장, 고동진 IT·모바일(IM)부문 사장 등 대표이사 3인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점은 이의 연장선상으로 해석된다. 또 지난 2015년 4명, 2017년 7명, 2018년 4명의 사장단이 교체된 것에 비하면 이번 인사 폭은 크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성과를 바탕으로 한 '핀셋' 인사는 더 두드러졌다. 이재승 소비자가전(CE) 부문 부사장이 삼성전자 최초로 생활가전 출신의 사장 승진자로 이름을 올린 것이 대표적이다. 현 김현석 CE부문 사장은 TV출신이다.
이 사장은 삼성전자 생활가전의 산 증인으로, '비스포크' 시리즈와 '무풍에어컨'의 히트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비스포크 등의 선전으로 삼성전자 CE 부문의 지난 3분기 영업이익은 1조5천6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00% 개선돼 분기 기준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사장이 지난 1월 생활가전사업부장으로 부임한 이후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왔다"며 "이번 사장 승진을 통해 가전사업의 글로벌 1등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과주의' 바탕으로 세대교체 가속
반도체 부문에서 50대의 이정배 부사장과 최시영 부사장이 각각 메모리사업부장과 파운드리 사업부장 사장으로 승진 발령한 것도 철저한 성과주의가 밑바탕이 됐다. 반도체 사업부 사장 3명 중 2명이 교체됐다는 점에선 '반도체 초격차'를 가속화하는 동시에 세대교체에 나섰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다만 기존에 메모리사업부장을 지내던 진교영 사장은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파운드리사업부장이던 정은승 사장은 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 사장을 맡게 됐다. CTO는 이번에 신설된 자리로, 반도체와 생활기술연구소를 관장하게 된다. 이는 반도체 공정 개발에 힘을 싣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를 통해 삼성전자는 오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133조 원을 투자해 '세계 1위'에 오르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반도체에서 메모리는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이라며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삼성전자가 이번 인사를 통해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정배 사장은 메모리사업부 D램 설계팀장, 상품기획팀장, 품질보증실장, D램개발실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메모리사업 성장을 견인해온 D램 분야 전문가로 꼽힌다.
최시영 사장은 반도체연구소 공정개발팀장, 파운드리제조기술센터장, 메모리제조기술센터장 등 반도체 사업의 핵심보직을 경험하면서 반도체 전 제품에 대한 공정 개발과 제조 부문을 이끌어 온 공정·제조 전문가다. 파운드리 사업은 성장성이 높아 삼성전자의 새로운 먹거리로 주목 받고 있는 핵심 사업으로, 1위인 대만 TSMC와 시장점유율 격차가 큰 상태에서 수장 역할을 하게 된 최 사장의 부담감이 클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정배 사장은 승진과 함께 메모리사업부장으로서 D램은 물론 낸드플래시, 솔루션 등 메모리 전 제품에서 경쟁사와의 초격차를 확대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며 "최시영 사장도 파운드리사업부장으로서 공정개발 전문성과 반도체 전 제품 제조 경험을 바탕으로 파운드리 세계 1위 달성의 발판을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디스플레이, 최주선 시대 활짝…이동훈 용퇴
삼성디스플레이는 최주선 사장을 새로운 사장으로 맞이하며 미래 준비에 본격 나섰다.
이날 인사를 통해 대형디스플레이사업부장인 최주선 부사장은 사장 겸 대형디스플레이사업부장으로 승진했고, 김성철 중소형디스플레이사업부장도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동훈 사장은 임기 동안 중국 업체들의 저가 액정표시장치(LCD) 공세로 실적 부진을 겪어 이번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최주선 신임 사장은 KAIST 전자공학 박사 출신으로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D램개발실장, 전략마케팅팀장, DS부문 미주총괄을 역임한 반도체 설계 전문가다. 또 지난 1월부터 삼성디스플레이 대형디스플레이사업부장을 맡아 퀀텀닷 디스플레이 개발을 이끌고 있다.
김성철 삼성디스플레이 중소형디스플레이사업부장 사장은 경희대 물리학 박사 출신으로 OLED 개발실장, 디스플레이연구소장, 중소형디스플레이 사업부장을 역임하며 OLED사업을 성장시킨 OLED 개발 전문가로 통한다.
삼성디스플레이 관계자는 "최 사장은 이번 승진과 함께 반도체 성공 노하우와 경험을 바탕으로 디스플레이사업의 일류화와 새로운 도약을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며 "부사장 이하 2021년도 정기 임원인사도 조만간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서현 남편 김재열, '인재 확보' 나선 이재용 지원 사격
이날 발표된 계열사 인사 중에선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의 남편인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가장 주목 받았다. 김 사장은 이번 인사에서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전략실장에 선임돼 삼성의 글로벌 핵심 인재 영입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됐다.
이는 지난 5월 '뉴 삼성 비전'을 발표하며 회사의 미래를 위해 외부에 있는 유능한 인재를 적극 영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적극 지원하기 위한 인사로 풀이된다. 이 부회장은 당시 "전문성과 통찰력을 갖춘 최고 수준의 경영만이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며 "삼성은 앞으로도 성별과 학벌 나아가 국적을 불문하고 훌륭한 인재를 모셔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삼성SDS는 이날 황성우 삼성전자 사장을 내정했다. 황 사장은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에서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다양한 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로, 나노 분야 전문가로 불린다.
삼성SDS 관계자는 "황 사장은 삼성전자 종기원에서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다양한 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경험과 글로벌 역량, 풍부한 대내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삼성SDS를 글로벌 IT 솔루션 기업으로 더욱 성장시켜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재계에선 이번 삼성 인사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오는 3일 또는 4일 있을 후속 임원인사에서도 젊은 유능한 인재를 대거 발탁하는 등 대대적인 쇄신 인사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는 이번 사장 인사로 승진자의 평균 연령은 56세로 작년과 같지만 전체 사장단 평균연령은 58세로 종전(59세)보다 한 살 젊어졌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성과가 있는 곳에 보상이 따른다'는 대원칙 아래 일부 조직개편과 세대교체를 통해 초격차 전략을 더 강화하겠다는 이 부회장의 의지가 드러났다"며 "안정 속 세대교체를 통한 핵심 사업부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인사"라고 평가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환경 속에 기존 3인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하면서 안정을 도모하는 동시에 혁신과 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과감한 쇄신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라며 "부사장 이하 2021년 정기 임원 인사와 조직개편도 조만간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장유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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