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조석근·한상연·이영웅 기자] 8월 2일 일본 정부가 한국을 마침내 전략물자 수출 우대국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했다. 국내 산업계의 소재, 부품 수급에도 비상이 걸렸다.
일본은 이번 조치로 수출규제 품목을 종전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불화 폴리이미드 등 3종에서 전략물자로 분류된 1천100여종으로 확대했다. 폭발물, 화기 등 직접적인 재래식 무기류 263종을 제외하면 생화학무기,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활용될 수 있는 소위 '이중용도' 900여종의 품목이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사정권에 들어간다.
그 중에는 반도체·디스플레이, 화학, 자동차 등 국내 수출 주력산업의 필수 소재, 부품이 적잖이 포함될 전망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은 앞서 소재 3종에 더해 품질과 직결되는 필수소재의 추가 수출규제 가능성에 촉각이 곤두서 있다. 차세대 시장인 전기차 배터리, 수소차 분야에서도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고순도 불화수소에 '화들짝'…다음 타깃은?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는 이번 수출규제 사태에 매우 민감한 분위기다. 대규모 장치산업의 특성상 공정 한 단계만 멈춰서도 수조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국내 전체 수출 20%를 차지하는 제1 수출 산업이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의 일본 수입 상위 10개 품목 가운데 4개가 반도체 제조장비, 프로세서 및 컨트롤러, 장비 부품 등 반도체 관련 품목이다. 더구나 일본의 전략물자 수출통제 리스트에도 메모리, 시스템 반도체는 물론 반도체 장비, 소재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그 때문에 이번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 이후로도 국내 반도체 산업은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주요 타깃이 될 전망이다.
우선 반도체의 가장 기초적 소재인 반도체 원판(웨이퍼)부터가 일본 업체들의 강세가 두드러지는 분야다. 국내에서도 SK실트론이 세계 시장의 10%가량을 차지하는 주요 공급사이긴 하지만 신에츠, 섬코 등 일본 업체들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60%에 달한다.
다만 앞선 수출규제 3종 중 고순도 불화수소와 달리 짧은 유통기한의 문제로 인한 재고 압박은 상대적으로 덜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체재 확보나 보관 문제에서 불화수소만큼 난감하진 않다"며 "장기적으로 수급 차질은 빚어질 수 있어도 삼성, SK하이닉스 등이 이미 어느 정도 확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웨이퍼에 화학물질을 입히는 증착, 회로를 그리는 노광, 회로를 새기는 식각 등 전공정 분야는 반도체 자체 품질과도 직결된다. 여기서 사용되는 필수소재들에서 일본 업체들이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게 반도체 업계의 입장이다.
노광 공정에 사용되는 일종의 필름 역할을 하는 블랭크 마스크의 경우 DNP, 호야 등 일본 화학업체들의 점유율이 지배적이다. 특히 극자외선(EUV) 공정용 블랭크 마스크는 호야가 독보적이다. 삼성전자가 EUV 공정을 이용한 차세대 제품 양산을 앞둔 시점에서 생산 차질이 예상된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의 OLED 패널 공정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디스플레이 증착 공정의 핵심 부품인 파인메탈 마스크의 경우 DNP가 90%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EUV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불화 폴리이미드를 포함, 전공정 분야에서 상당 부분 일본 업체들이 강세를 나타내고 있지만 이번 수출규제에 따른 영향이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산업연구원 김양팽 연구원은 "기업들이 일본산 제품의 거래처, 공정상 비중, 거래량 등을 일종의 영업기밀로 여겨 노출하지 않으려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도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화이트리스트 배제 이후 본격적인 전방위 수출규제국면에서 피해를 호소하는 기업들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터리 소재, 자동차 부품도 수출규제 '사정권'
국내 화학업계의 경우 대일 의존도가 높은 대표적인 분야로 꼽힌다. 정밀화학 원료가 지난해 기준 전체 일본 수입품목 3위로 기초화학에선 자일렌 한 품목만 해도 대일 수입액 10억8천만 달러(약 1조2천억원)으로 13위를 차지했다. 국내 자일렌 95%가 일본산이다. 마찬가지 핵심 기초화학 원료인 톨루엔의 경우 80%가 일본에서 조달된다.
다만 기초화학에선 국내 화학업체들과 일본 기업들의 합작 운영이 많다. SK종합화학의 경우 일본 JX에너지와 5:5 합작으로 연산 100만톤 규모 공장을 운영 중이다.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도 마찬가지 일본 업체들과 합작 형태 공장을 운영 중이다.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기초화학 소재의 경우 대부분 이들 공장에서 수입한다는 것이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일본이 아무리 한국을 견제하고 싶어도 한국에 있는 자국 기업 회사에 원료 납품을 중단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기초화학 소재들의 경우 국내 정유, 석화업체들도 생산할 수 있어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밀화학은 사정이 다르다. 일본 업체들이 원천기술을 갖고 핵심소재 공급을 틀어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당초 포토레지스트, 컬러필터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를 공급하는 곳이 일본 정밀화학 업체들이다.
국내 정밀화학 업계에서 피해가 예상되는 대표적인 업종은 배터리 분야다. 삼성SDI,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 업체들이 전기차 시장을 겨냥,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배터리 핵심 소재인 분리막의 경우 아사히카세이, 도레이가 세계 1, 3위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배터리를 감싸는 파우치의 경우 DNP와 쇼와덴코가 세계 시장 70%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자동차 업계와 정부가 나란히 수소경제 로드맵을 발표하며 핵심 미래산업으로 삼고 있는 수소차 분야의 타격도 예상된다. 수소차를 가동하는 연료전지 시스템은 한국이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전기차 배터리와 마찬가지로 전해질, 밀봉재 등 주요 소재의 국산화율이 저조해 일본 업체들에 대한 의존도가 크다는 것이다.
또한 수소저당탱크, 전력변환장치 등 핵심 부품들이 전략물자로 분류되고 있다. 화이트리스트 배제 이후 본격적인 수출관리 국면에서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다.
자동차는 3만개에 이르는 부품을 중심으로 광범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국내 완성차 업계의 1차 협력사만 해도 대기업 257개, 중소기업 574개로 이들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부터 공작기계, 파워트레인(동력계), 전장용 부품을 수입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서 조달하는 부품과 소재 중 20% 가까이가 일본산"이라며 "자동차 부품업계의 피해가 적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석근 기자 [email protected]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