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수기자] 한국 게임산업이 길을 잃었다. 지난 1990년대말 '바람의나라' '리니지' 흥행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해온 한국의 게임산업이 20년 만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그동안 자체 개발 게임으로 내수 시장을 지켜왔던 한국의 게임사들은 어느새 턱 밑까지 밀려든 외산 게임에 안방까지 내줄 상황에 봉착했다.
한국 게임의 위기를 알려주는 뚜렷한 신호들이 최근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연달아 포착됐다. 판에 박힌 한국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성으로 무장한 외산 게임들이 등장하고 또 게이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게임강국'을 이끌어온 한국 게임사들의 자존심이 한풀 꺾이고 있다.
올해 5월 출시된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의 '오버워치'는 4년째 철옹성같은 입지를 이어온 라이엇게임즈의 '리그오브레전드'를 꺾고 국내 PC방 순위 1위에 올라 모두를 놀라게 했다. 개성강 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오버워치'의 절묘한 슈팅 액션은 한국 게이머들을 매료시키며 '역시 블리자드'를 연호하게 했다. 블리자드는 90년대말 내놓은 '스타크래프트'를 흥행시키며 국내 PC방 산업이 불을 지피게 한 일등공신이다.
닌텐도와 나이언틱이 공동 개발한 모바일 게임 '포켓몬고'도 국내서 광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년간 널리 사랑받은 '포켓몬스터' 지식재산권(IP)과 증강현실(AR) 기술이 접목된 이 게임은 신드롬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화제를 모으는 중이다.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은 한국에서도 벌써 100만명이 넘는 이용자가 나올 정도다. 게이머들은 '포켓몬고'의 한국 출시를 고대하고 있다.
◆'금기' 건드려 성공
흥미로운 점은 두 게임 모두 한국서는 '금기'로 알려진 것을 건드려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다.
'근미래 세계관의 게임은 한국에서 망한다'는 통념을 깨뜨린 '오버워치'는 중세 판타지풍 일색인 한국 게임들에 '어퍼컷'을 날렸다. '포켓몬고'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증강현실 기술을 도입해 게이머들을 게임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집 밖에 나가 운동을 하게 하는 부수효과까지 일으켰다.
흥행성이 검증된 게임만을 좇느라 엇비슷한 것이 많은 한국 게임들에서는 찾아보지 못하는 개성이다. 한국 게임사들은 두 게임을 착잡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오버워치'와 '포켓몬고'가 우리 게임 시장에 미친 파장은 상당했다. PC방 정보사이트 게임트릭스에 따르면 현재 '오버워치'는 점유율 34.3%로 1위를 이어가고 있다. '오버워치'의 경쟁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국산 게임인 '서든어택2'가 10위권 밖으로 밀린 것과 대조를 이룬다. '오버워치'와 2위 '리그오브레전드(23.77%)'까지 더한 점유율은 58.07%에 육박한다. 단 2개의 외산 게임이 국내 시장의 절반을 점유한 셈이다.
'포켓몬고'가 국내 안드로이드 게임앱 순위 4위에 올랐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모바일 시장조사 업체 와이즈앱은 지난 18일 '포켓몬고'가 국내 안드로이드 게임앱 순위 4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해외 구글플레이 계정을 별도로 마련해야 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이 앱을 설치한 한국 이용자는 126만명에 이르렀다. '포켓몬고'는 출시 직후 미국 애플 앱스토어 최고 매출 순위 1위를 석권했는데 한국에서도 출시될 경우 이러한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오버워치'와 '포켓몬고'가 던진 메시지
'오버워치'와 '포켓몬고'가 한국 게임산업에 던진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동안 답습해 왔던 방법만으로는 이들 게임과 경쟁할 수 없다는 묵직한 경고가 내포돼 있어서다.
실제로 최근 한국 게임은 외산 게임과의 품질 경쟁에서 조금씩 밀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주류로 자리매김한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뚜렷이 포착된다. 구글플레이 최고 매출 순위 10위권에는 외산 게임이 3개나 올라 있다. 20위권 중에서는 7개다. 한때 한국 게임사들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되던 중국 게임들이 어느새 역으로 한국 시장을 점령한 상태라는 점도 우려를 낳게 하는 부분이다.
수년간 외산 게임과의 경쟁에서 밀린 한국 게임산업의 위기감은 각종 지표 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3월 한국경제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우리나라 게임 사업체 수는 2009년 3만개에서 2014년 1만4천개로 절반 이상 줄었다. 게임 사업 종사자는 2009년 9만2천여명에서 2014년 약 8만7천여명으로 감소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16년 1분기 콘텐츠산업 동향분석'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국내 게임사 매출은 2조4천339억4천200만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6% 성장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게임 수출의 경우 7억2천16만4천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0.2% 보합세에 머물렀다. 내수와 수출 모두 정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다.
◆규제도 문제지만…한국 게임사가 더 문제
한때 '게임강국'으로 불리우던 한국의 게임산업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대표적인 요인으로 산업발전을 옥죄는 각종 '규제'가 지목된다. 게임은 창의적이고 다채로운 상상력의 결과물이지만, 우리나라는 정부 차원의 사전 심의제도를 통해 자유로운 게임 창작 환경을 상당부분 제한했다.
만 16세 미만 청소년의 심야시간 온라인 게임 접속을 일괄 차단하는 강제적 셧다운제, '게임은 마약'이라는 이미지를 만든 4대 중독법 발의 등은 게임의 부정적 이미지만을 부각시켰다. 이는 게임산업 종사자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규제도 문제지만 게임의 본질인 재미보다 수익성만을 좇는 한국 게임사들이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흥행한 게임을 맹목적으로 베껴 내놓는 개발 행태도 눈총을 사고 있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확률형 아이템 규제 논란은 한국 게임산업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게임사들이 지난 수년간 게이머들이 원하는 아이템을 1% 미만의 확률에 가둬두고 반복적으로 아이템을 구매하게 한 게임사들의 행태는 결국 이용자들이 외산 게임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됐다.
실제로 '오버워치'나 '포켓몬고'에서는 확률형 아이템을 아예 판매하지 않거나, 판매하더라도 게임 내 밸런스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수준이다.
게임사들은 작년 7월부터 유료 확률형 아이템의 습득률을 공개하는 자율규제를 시행 중인데, 정작 게이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16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온라인 게임 이용자 중 확률형 아이템 이용 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에게 현재의 자율규제 방식에 대한 만족도를 물어본 결과, 66.7%가 현재 방식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완화되는 규제…게임사도 바뀌어야
이처럼 한국 게임산업의 위기가 피부에 와닿았는지 그동안 게임을 규제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정치권이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열린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은 경쟁력이 급락한 한국 게임산업의 위상을 언급하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정부 차원의 게임진흥책도 나오기 시작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는 2019년까지 국내 게임 시장 규모를 13조원까지 확대하고 수출 규모도 40억달러까지 늘리겠다는 내용의 '게임산업진흥 중장기계획'을 내놨다.
이어 지난 18일에는 게임의 문화적 가치를 제고하고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범부처 진흥책인 '게임문화 진흥계획'을 오는 2020년까지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게임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발굴하고 활용하면서 선순환되는 게임문화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취지다.
게임 규제의 상징으로 불리우는 강제적 셧다운제가 부모선택제로의 완화를 앞두고 있다. 더불어 민간 사업자들의 자율심의 권한을 확대하는 게임법 개정안이 지난 19대 국회를 통과하는 등 산업을 옥죄던 규제도 점차 해소되는 분위기다.
게임인으로는 처음으로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이 20대 국회에 입성하면서 게임산업 규제가 앞으로도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조성되고 있다.
이처럼 정치권이 뒤늦게나마 위기에 처한 게임산업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만큼 한국의 게임사들 역시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판에 박힌 한국 게임을 외면하고 외산 게임만을 찾는 이용자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국내 게임 커뮤니티의 한 이용자는 "지금 (한국 게임은) 중국에 버금갈 정도로 베끼는 데 주력하는 중"이라며 "이용자들은 결국 표절 게임 위주로 플레이하게 되고 제작사는 그게 또 통하는 줄 알고 랜덤박스(확률형 아이템)까지 만들어대니 한국 게임 시장 망해도 할 말이 없다"고 지적했다. 한국 게임의 현주소다.
문영수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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