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례기자] 명문대 출신의 삼성전자 차장 A씨. 지난 추석을 앞두고 회사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얘기를 들었다. 희망퇴직 대상자라며 퇴직을 종용받은 것.
자존심이 상해도 어떻게든 버텨볼까 했지만 회사로부터 "그나마 노동법이 개정되면 위로금도 없이 나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결국 퇴직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고참부장인 B씨 역시 같은 통보를 받았다. B씨는 승진연한을 채우고도 임원승진에서 누락된 경우. 예년 같으면 정년까지 버티다 부장으로 퇴임할 수 있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인사담당자는 B씨에게 "무급휴직을 하거나 2년치 월급을 받는 조건으로 퇴직하라"고 통보했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연말 인사철을 앞두고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계열에 희망퇴직 바람이 거세다. 과장 이상 중간관리자를 대상으로 연한을 채우고도 승진에서 누락됐거나 인사고과 등에서 낮은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 주 대상자다.
삼성의 인력감축 바람은 이미 지난해부터 불기 시작했다. 삼성 측은 공식적으로 "인위적인 인력감축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적악화, 조직 효율화 등 이유로 인력 재배치, 희망퇴직 등을 통한 인력감축은 이미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형국이다.
실제로 지난해 실적이 악화된 금융계열을 시작으로 올들어 삼성물산에서도 대규모 인력감축이 이뤄지고 있다.
삼성물산에서 퇴직한 C씨는 "감사철 여러 이유로 불명예 퇴직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경영악화 등을 이유로 퇴직을 권고 받을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경우도 지난해 실적이 악화된 휴대폰부문을 시작으로 올들어 TV사업부, 최근의 지원부서는 물론 삼성 전자계열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고참부장에 대한 희망퇴직은 통상적인 수준으로 부서별 감축목표를 할당해 인위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물론 주요 계열사들의 인력감축 규모가 2천명에 달한다거나, 전체의 10~20% 수준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삼성 계열 한 관계자는 "50세 이상 부장은 모두 내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며 "지난해 임금피크제 도입 및 정년연장 등으로 60세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삼성전자 분기 영업익 7조원인데…인력감축 왜?
삼성 위기설의 진원지가 됐던 삼성전자가 올들어 실적이 개선되면서 최근의 인력감축이 과도하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삼성의 최근 위기론은 2013년을 고점으로 삼성전자의 성장을 이끌던 스마트폰 등 휴대폰 사업의 실적이 둔화된 게 발단이 됐다. 삼성전자는 이 탓에 지난해 영업익이 전년보다 10조원이나 줄어드는 등 매출과 이익 모두 IMF이후 첫 역성장 했다.
하지만 올들어 바닥을 친 모양새다. 3분기에는 분기 영업익 7조원을 회복하며 올해 연간 영업익은 지난해 25조원 수준을 웃도는 26조원 안팎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 관계자는 "영업익은 회복 되고 있지만 매출이 둔화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며 "스마트폰, TV 등 완제품의 글로벌 시장이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 사이클 등 변수가 많은 반도체가 주도하는 현재 실적은 여전히 불안요인이 크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스마트폰 등을 잇는 뚜렷한 성장엔진이 없다는 것도 삼성의 위기론을 부추기고 있다. 여기에 글로벌 저성장 기조가 뚜렷해지면서 이에 맞춘 사업재편과 함께 인력효율화 등 작업이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당분간 저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과거 호황기 커진 조직과 인력규모에 대한 일정부분 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이를 설명했다.
◆정부 방침-이재용 체제 전환 기폭제?
일각에서는 삼성의 이같은 움직임은 정부의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 도입, 청년일자리 창출, 저성과자 퇴출 등 노동개혁 작업이 직격탄이 됐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삼성은 정부의 정년연장에 맞춰 지난해 정년을 60세로 연장하고 임금피크제를 선제 도입키로한 바 있다.
정년연장으로 비용부담이 커진데다 정부의 정책 방향이 기업들의 중간관리자에 대한 감축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로부터)고참 부장 1명이 나가면 2~3명의 신규 채용 효과로 이어진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여기에 이재용 체제 전환 등 삼성 그룹 지배구조 변화와 사업 재편 등 조치도 이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병중인 가운데 이재용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경영 승계 관련 작업에 속도를 내왔다. 최근 삼성의 지주사격이자 이재용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옛 에버랜드가 삼성물산과 합병, 통합 삼성물산이 출범하면서 이재용 체제를 위한 작업이 일단락 됐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 체제에 맞춰 계열별 합병이나 매각, 사업재편에 맞춘 조직 효율화 등 이른바 '이재용식 실용주의'로 불리는 조치가 이어지고 있는 것.
실제로 삼성은 불용자산인 전용기나 삼성생명 사옥 매각은 물론 현장 위주의 인력 재배치 등 조직 슬림화 및 효율화를 꾀하고 있다. 또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선언 이후 이어져온 인사 등 각종 조직과 제도도 달라진 경영환경에 맞춰 손보고 있다.
20년만에 개편되는 인사제도는 연공서열을 파괴하고, 능력별 평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성이 이에 앞서 중간관리자층을 줄이고 나섰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삼성이 공식적으로 대규모 인력감축 등 구조조정에 나선 것은 지난 1997년 IMF때 외에는사실상 없었다는 점을 들어 삼성이 지배구조 전환기 실적둔화나 사업재편을 이유로 인력감축부터 나선 것은 우려스럽다는 지적도 있다. 더욱이 삼성 움직임이 여타 그룹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파장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과거 2007년이나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 위기설이 나왔지만 대규모 구조조정보다 오히려 투자나 고용을 늘리는 방식으로 돌파하며 재계를 이끌었다"며 "내년 경영환경이 더욱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삼성의 이같은 움직임은 재계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영례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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