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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기]실리콘밸리 넘기 위해선 밸리가 되선 안 된다


[김석기의 IT 인사이트]

서울의 동네 이름 중 서린동, 적선동, 군자동 같은 오래된 동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도성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정도전이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 때 도성 밖에 있던 동네 중에 마장동, 역촌동, 역삼동, 구파발, 말죽거리 등은 파발마, 즉 말과 관련된 지명이며, 잠실, 잠원 등은 양잠을 장려하던 조선 왕실에 뽕나무 잎을 공급하던 동네의 이름이다.

지명은 아픈 역사에서도 유래한다. 이태원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겁탈당한 여승들이 아이를 낳은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미아리 텍사스는 공식적인 행정구역상의 명칭은 아니지만 역시 미군부대와 관련있는 아픈 지명 중에 하나이다. 이촌동은 일제시대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으로 ‘이촌(二村)’이란 일본식 동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듯 지명에는 역사가 녹아있고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단순히 지역을 구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역사와 특성 지리적인 요건 등을 고려해서 붙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장 어의 없는 지명 중 하나가 바로 ‘압구정 로데오(Rodeo)’이다.

압구정동이야 조선시대 한명회의 호를 딴 정자에서 붙인 이름이니 상관없는데, 로데오는 대체 어디서 나온 지명일까? 압구정동 근처의 상가들이 해당지역을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걸 ‘압구정 로데오역’으로 붙이면서 ‘압구정 로데오’가 공식적인 지명이 된 것이다. 역사적인 근거가 아무것도 없는 무국적 지명의 탄생이다.

이처럼 명칭은 ‘말죽거리’처럼 자연발생적인 지명이 아니라 일부러 붙일 때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ICN으로 알고있는 인천공항은 처음에는 전전대통령의 호를 딴 ‘일해공항’이었다가 한국에도 ‘JFK공항’이나 ‘드골공항’처럼 대통령이름을 따서 붙이자고 주장하여 ‘김영삼공항’이 (어이없게도) 될뻔했다가 ‘세종공항’을 거쳐 인천공항이 된 것이다.

세계의 벤처 단지 이름들을 보자. 실리콘 밸리는 1950년대부터 반도체 제조회사들을 중심으로 지역이 발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도체의 주원료인 실리콘 그리고 해당지역의 지형이 계곡처럼 경사가 있어 ‘실리콘 밸리’가 되었고 반도체를 중심으로 IT가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벤처단지이름은 ‘도르트문트 기술센터(Dordmund Technologie Park)’이고, 영국은 캐임브릿지 사이언스 파크(Cambridge Science Park)), 프랑스는 소피아 앙티폴리스, 일본의 가나가와(神奈川) 사이언스파크, 대만은 신주과학산업단지(新竹科學工業園區)이다. 독일이나 영국은 대학을 중심으로 연구/산업 단지가 조성되어있고, 일본/대만은 단지가 위치한 곳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미국의 대표 벤처 단지는 서부의 ‘실리콘 밸리’이지만 동부 뉴욕의 벤처 거점은 ‘실리콘 앨리’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벤처지역 중 실리콘 밸리를 제외하고는 ‘밸리’라고 명칭을 부여한 지역은 없다. 벤처지역에 ‘~밸리’라고 붙이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었다면 ‘실리콘 앨리’가 아니라 ‘뉴욕 밸리나 맨하탄 밸리’가 되어야 했을 것이고, ‘도르트문트 밸리’, ‘캐임브릿지 밸리’라고 불렸어야 한다. 그런데 왜 한국만 ‘테헤란 밸리’같은 명칭이 붙었을까?

테헤란 밸리는 테헤란로 근처에 IT벤처기업들이 몰려들면서 2000년초 IT 버블 시절 언론사 기자들이 기사에 붙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테헤란로 자체는 서울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 자매도시가 되면서 서울에는 삼릉로가 이름을 바꿔 ‘테헤란로’로,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생긴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물론 ‘테헤란 밸리’는 행정구역상의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며 부지불식간에 자연발생적으로 붙여진 명칭이지만, 평평해서 경사도 없는 지역이나 빌딩이 웬 계곡(Valley)인가? 아마도 한국의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가 되라는 의미로 붙인 듯 한데, 조선시대의 ‘소중화(小中華)’라는 사대주의와 다르지 않다. 소중화 사상이란 말 그대로 '작은 중국.'을 말하며 조선이 ‘작은 중국’이다. 라는 사상이다. (작은 중국이라고 말하는 것과 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 말하는 것은 크게 다를 게 없다.)

여기에는 소중화사상처럼 한국의 벤처단지들이 실리콘 밸리를 절대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가 알게 모르게 깔려있다. 한국의 벤처단지가 실리콘 밸리를 뛰어넘는 세계 제일의 벤처지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실리콘 밸리의 이름을 따라한 명칭을 지어 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정말 신중하게 고민해서 이름을 작명한다. 심지어 이름대로 살아간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과 중요성이 크다는 말이다. ~밸리라는 이름으로는 실리콘 밸리를 넘어선다 하더라도 결국 짝퉁소리를 듣게 되어 있다. 지금이라도 ~밸리 말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벤처단지가 실리콘 밸리는 넘기 위해서는 XX밸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김석기 ([email protected])

모폰웨어러블스 대표이사로 일하며 웨어러블디바이스를 개발 중이다. 모바일 전문 컨설팅사인 로아컨설팅 이사, 중앙일보 뉴디바이스 사업총괄, 다음커뮤니케이션, 삼성전자 근무 등 IT업계에서 18년간 일하고 있다. IT산업 관련 강연과 기고를 통해 사람들과 인사이트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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