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애플 간의 역사적인 특허소송을 주관하고 있는 루시 고 판사가 또 다시 화해를 종용했다. 두 회사가 특허 분쟁을 시작한 이래 벌써 세 번째다.
외신들에 따르면 미국 새너제이 지역법원의 루시 고 판사는 15일(현지시간) "배심원 평결까지 가게 되면 두 회사 모두 위험요소를 떠안아야 한다"면서 "한 번 더 (화해를)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고 판사는 이날 공판 시작 직전 변호사들에게 삼성과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전화로 한 차례 더 협상하도록 하라고 통보했다. 두 회사 변호사들은 각각 팀 쿡 애플 CEO와 삼성 최고 경영진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달하겠다고 대답했다.
◆법정 안팎 사정 모두 판결까지 가기엔 부담스런 상황
법정 안에선 두 회사간 신경전이 도를 넘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면서 짜증스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루시 고 판사는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양측 변호사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법정 밖 상황은 더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삼성과 애플은 IT 분야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스마트폰 시장 1, 2위를 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배심원들이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줄 경우 '블루오션'으로 통하는 스마트폰 시장이 인위적으로 재조정될 수도 있다. 제 아무리 판사라고 하더라도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루시 고 판사는 이미 재판 시작 전부터 양측에 웬만하면 법정 밖에서 화해를 하라고 종용했다.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삼성과 애플 CEO 회동을 주선했다. 하지만 삼성과 애플은 CEO 회동에서도 합의점을 찾아내지 못하면서 고 판사의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재판 시작 이후에도 두 회사는 증인 채택부터 증거자료 사용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초기엔 삼성 쪽이 신경전을 많이 벌였다. 재판 시작 전 기각된 증인과 증거 자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 삼성 측은 지난 달 31일엔 법정 기각 자료를 언론에 배포하면서 판사의 신경을 건드렸다. 별다른 제재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루시 고 판사 입장에선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애플의 신경전도 만만치 않았다. 재판이 시작된 지 두 주 만에 영업 관련 증거 자료 제출 명령에 불복해 항소를 한 것. 또 지난 14일 공판 때는 삼성 측 증인이 증언대에 오르기 직전 "증언을 막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급기야 루시 고 판사는 14일 "양측 변호사가 법정에서 하는 말은 어느 것도 믿지 못하겠다"면서 "앞으로는 말로만 하지 말고 실제 문서를 제출해 달라"고 주문했다.
루시 고 판사가 법정 밖 화해를 권고한 것은 양측의 지나친 신경전 때문에 자칫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에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두 회사가 갖는 무게를 감안해 웬만하면 배심원 판결까지 가지 않도록 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루시 고 판사 "소기 목적 달성했으니 그만 화해하라"
루시 고 판사는 이날 양측 변호인들에게 이런 심경을 여과 없이 그대로 털어놨다. 서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그만 싸워도 되지 않겠느냐는 주문도 빼놓지 않았다.
외신들에 따르면 루시 고 판사는 "이번 재판을 통해 특허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 했다면 충분히 메시지가 전달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삼성과 애플 모두) 공판을 통해 지적재산권의 '대외 가치'가 유효하다는 점을 이미 널리 알렸다"고 덧붙였다.
삼성과 애플은 지난 2011년 4월부터 특허 분쟁을 시작했다. 애플은 삼성이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독특한 디자인과 유저인터페이스(UI)를 무차별적으로 베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삼성은 애플의 특허가 독창적이지 않다고 맞서고 있다. 또 애플 역시 통신 특허를 비롯해 삼성의 주요 기술들을 무차별 도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로 합의점을 찾기 쉽지 않은 주장을 펼치면서 폭로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자칫하면 삼성과 애플 모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그 동안 비밀주의를 유지해 온 애플 측은 각종 내부 문건들이 법정에서 공개되면서 상당히 당혹스런 상황을 맞고 있다. 급기야 "내밀한 영업이나 마케팅 관련 자료를 공개하라는 건 부당하다"면서 항소를 제기했다.
루시 고 판사는 이날 양측 변호사들에게 "배심원까지 갈 경우 입게될 리스크(risk)가 훤히 보인다"고 강조했다. 어느 쪽이 이기든 또 다른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판사의 요청에 따라 삼성과 애플 최고경영진은 또 한 차례 협상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기는 배심원 평결이 시작될 다음 주말 이전이 될 가능성이 많다. 물론 양측의 입장 차가 적지 않기 때문에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거듭된 판사의 요청이 있었던 만큼 극적인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특허 가치에 대한 의견 차이 극복이 관건
과연 삼성과 애플은 배심원 평결까지 가지 않고 극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외신들에 따르면 두 차례 회동에서 양측이 화해에 실패한 것은 상대방 특허 가치에 대한 입장 차이가 컸던 때문이다.
지난 5월과 7월 회동 때 양측이 가장 큰 이견을 보인 건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표준 특허의 가치를 산정하는 부분이었다. 표준특허는 이미 산업계에서 국제표준이 된 필수 기술을 뜻하는 것으로 특히 유럽 쪽에선 표준특허 보유업체에 대해 '공정하고,합리적이고,비차별적 방식'으로 특허 사용료를 산정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당연히 애플 측은 표준 특허는 성격상 가치를 낮게 책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삼성은 자신들의 필수 표준 특허의 가치가 애플이 보유하고 있는 특허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갖는다고 맞섰다. 특히 4G 같은 차세대 기술에선 자신들의 특허 포트폴리오가 애플보다 더 막강한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번 회동에서도 이 문제가 핵심 이슈가 될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 서로 조금씩 양보할 경우엔 극적인 타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표준특허에 대한 견해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다. 당장 배심원 평결까지는 2주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5월과 7월 회동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양측 모두 진흙탕 싸움을 한 터라 적당한 명분과 실리를 찾은 뒤 끝내고픈 욕구는 그 때보다는 더 강할 가능성이 많다. 루시 고 판사의 말대로 재판을 통해 각자가 보유하고 있는 특허권의 가치를 충분히 알리는 데도 성공했다.
명분은 어느 정도 찾은 만큼 이젠 실리가 문제다. 과연 삼성과 애플은 적당한 선에서 싸움을 멈출 수 있을까? '초읽기'에 들어간 세기의재판을 두 회사가 어떻게 마무리 할 지에 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김익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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