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수기자] 정부가 의약분업 이후 사상 최대 규모의 약가 인하를 단행한다.
특허가 만료되는 오리지널과 제네릭(복제약)의 약가를 모두 53.55%로 일괄 인하하고, 동일 성분 의약품을 건강보험에 등재된 순서에 따라 약품 가격을 차등 결정하던 계단식 약가방식도 폐지한다.
이는 제네릭(복제약) 시장 육성에 초점을 맞춘 종전 약가산정방식을 대폭 개선해 신약 개발을 위한 R&D(연구개발) 투자 없이 리베이트 영업에만 치중하는 국내 제약업계를 개편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제약업계는 집단적으로 법적 대응도 불사할 방침을 밝히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 귀추가 주목된다.
◆복지부, 오리지널·복제약 약값 '반토막' 일괄 약가인하…"제약산업 R&D 위주로 개편"
보건복지부는 내년부터 특허가 만료되는 오리지널 의약품과 복제약의 약가를 53.55%로 일괄 인하하고 계단식 약가산정방식을 폐지한다고 12일 밝혔다.
진수희(사진, 위) 복지부 장관은 12일 오전 9시30분 개최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약값의 대폭 인하와 제약산업의 체질 개선 및 글로벌 역량 강화 방안을 골자로 한 '약가제도 개편 및 제약산업 선진화 방안'을 보고하고 "내년 1월 시행을 목표로 관련 규정 정비를 추진한다"면서 "정비가 끝나면 국민 약값 부담이 연간 약 2조1천억원가량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진 장관은 또 "이번 방안은 약품비 거품을 제거해 국민 부담을 줄이고 제약산업을 연구개발 중심으로 선진화하기 위한 일"이라며 "다양한 국가와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국제 경쟁이 강화되고 건강보험 재정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정책 추진의 적기라고 판단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보고된 약가제도 개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동일 성분 의약품임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에 등재된 순서에 따라 약품 가격을 차등 결정하던 '계단식 약가방식'이 폐지된다.
동일 성분 의약품에 대해 동일한 보험 상한가를 부여해 제약사들이 복제약을 먼저 등록하려고 경쟁하는 행태에서 벗어나 품질경쟁에 나서게 될 것이라는 게 복지부의 설명이다.
또 특허만료 후에는 오리지널약과 복제약 모두 특허만료전 약값의 53.55%선으로 대폭 낮추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특허 만료된 오리지널 약은 최초 오리지널의 80%, 첫 복제약(퍼스트제네릭)은 최초 오리지널의 68%를 약값으로 인정해 줬다.
다만 특허만료 후 1년 동안은 안정적인 공급과 복제약의 빠른 등재를 유도하기 위해 오리지널은 70%, 복제약은 59.5% 수준으로 완화키로 했다.
이같은 방식은 기존 약에도 일괄 적용돼 내년 상반기에는 대부분의 약들이 특허만료 전 약가의 53.55%로 일괄 인하된다.
복지부의 계획대로 약가 인하가 진행되면 전체 의약품 1만4천410개 품목 가운데 60.9%인 8천776개 품목의 가격이 내년 1월부터 평균 20%가량 인하된다. 다만 단독 등재된 의약품 2천142종, 퇴장방지·희귀·저가의약품 1천237종 등 3천659개 품목은 인하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경우 국민 부담액 6천억원, 건강보험지출 1조5천억원 등 연간 2조1천억원의 약값 절감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복지부는 추산했다. 또 현재 전체 건강보험 급여의 30% 수준인 약품비 비중도 24%대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함께 복지부는 그동안 복제약 판매와 리베이트 위주의 영업 관행을 개선하고 연구개발(R&D) 중심으로 제약산업을 선진화시키기 위한 체질 개선책도 내놓았다.
일정 규모 이상의 연구개발 투자 역량과 글로벌 진출 실적을 갖춘 '혁신형 제약기업'을 선정, 집중 지원할 방침이다.
제약기업이 생산한 복제약의 경우 최초 1년 동안 현행과 동일한 수준(68%)으로 책정하는 약가우대, 법인세 50% 감면 등 세제지원, 금융지원(혁신형 제약 전용 채권담보부증권 발행·신용보증기금을 통한 특례보증·제3자 배정 유상증자 지원) 등 혜택을 준다.
또 이들 혁신형 제약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돕기 위한 펀드(가칭 '콜럼버스 펀드')를 조성해 약제비 절감에 따른 국고 지원 예상절감액과 리베이트 위반 과징금 등을 활용해 R&D 지원을 위한 재원도 마련키로 했다.
복지부는 올 연말까지 각계의 의견수렴을 거쳐 관련 법령을 정비한 뒤 내년 1월부터 약가산정방식 등을 변경해 약값 인하 효과를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제약업계 "감내 여력 없다"…사상 초유 '제약사 CEO' 집단 시위·법적 대응도 불사
하지만 제약업계는 이같은 약가인하 방안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 방안이 시행될 경우 연간 2조원이 넘는 매출 손실은 물론, 대량의 고용해고 사태가 발생해 제약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게 제약업계의 주장이다.
제약협회 관계자는 "이미 진행 중인 기등재의약품 목록정비로 8천900억원의 약값이 인하됐고 지난해 말 시행한 시장형 실거래가 상환제도로 1조원의 매출 손실이 발생하고 있는데 추가로 2조원에 이르는 약가를 인하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며 "이미 제약업계가 감내할 수준을 넘어섰다. 약가를 인하해야 한다면 이미 진행 중인 약가 인하가 종료되는 2014년 이후에 재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특히 이같은 매출 감소로 인해 연구개발 중심 제약사들의 R&D 투자비가 대폭 줄어들어 신약 개발 의욕을 근절시킬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A제약사 관계자는 "약가 하향 조정 비율이 명확한 기준도 없고 제약 산업 전반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조치"라며 "이번 약가인하로 각 제약사마다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매출 감소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어느 회사가 R&D 투자에 엄두를 내겠느냐"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혁신형 제약기업을 발굴해 제약산업을 지원하겠다는 정부 정책과는 반대로 가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오전 제약사 사장단을 비롯해 임직원 등 제약업계 관계자 100여명은 서울 방배동 제약회관 앞에서 사상 초유의 '약가인하 반대' 집단 시위를 벌인 후 복지부를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앞서 제약업계는 정부의 추가 약가인하에 대해 주요 기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제약산업의 생존을 위해 법적 대응까지 불사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제약업계가 현재 검토 중인 '법적 대응' 방식은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등으로 알려졌다. 이번 추가 약가인하 관련 고시가 재산권 침해에 관한 사항인데도 법률이 아닌 장관 고시로 이뤄지는 데 대한 이의 제기로 헌법소원이 가능하다.
또 고시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 실제로 약값이 인하되면 '정부의 행정행위로 손해가 발생했다'는 취지로 행정소송에 나설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정기수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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