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통신솔루션 벤처기업의 A 사장은 수차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관계가 돈독해진 대형 통신사 담당자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A 사장의 회사가 개발해서 제품화 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업을 하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아이디어를 보내준다던 대형 통신사 담당자는 거의 완성된 수준의 통신 솔루션용 기술 소스코드를 A 사장에게 보내왔다. A 사장이 이 소스코드를 가만 보니 벤처기업 B사의 특허가 핵심 내용이었다. A 사장은 '혹시나...' 하면서 B사에 연락했다. B사 대표는 "함께 개발하자면서 받아간 우리 기술로 지금 A 사장에게 개발을 의뢰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펄쩍 뛰는 것이었다.
A 사장은 "(대기업이) 함께 개발하자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남의 기술을 도둑질하다시피 해 우리 회사에 넘긴 것을 알게 됐다"며 "남의 일 같지 않아 한동안 가슴이 멍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기술 '훔치는' 것이 당연한 일상?
중기벤처 업계 관계자들은 아직도 계속되는 대표적인 '게임의 법칙' 중 하나가 바로 대기업의 '기술 훔치기'라고 말한다. 중소업체가 천신만고 끝에 내놓은 아이디어나 기술을 대기업이 갑을(甲乙) 관계를 앞세워 가로채버리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기술유출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은 2천 곳이 넘고 그 피해 규모는 4조2천억원이 넘는다.
앞서 예를 든 A 사장은 통신사가 B사의 기술을 훔친 결과물을 직접 체험한 셈이다. A 사장은 스스로도 B사와 같은 사례를 겪었다고 말한다. 어쩌다 생기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를 친다"고 말했다.
"통신사 C사가 발주한 프로젝트에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왔어요. 우리 회사 기술에 흥미가 있다며 좀 더 면밀히 보고 싶다는 거였죠. 한달음에 달려갔더니 해당 기술의 '소스코드'를 달라고 하더군요. 아무 의심 없이 그 소스코드를 건넸는데 3개월 후 C사에서 '독자개발'한 서비스라며 우리 기술을 상품화해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A 사장은 당시 C사에 항의해 봤지만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앞으로도 C사와 맺어 나가야 할 관계를 생각하면 소송과 같은 분쟁은 꿈도 꿀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몇 주 동안 밤잠을 설치며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삭이는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A 사장은 C사가 종종 또 다른 기술의 소스코드를 요청할 때 결말을 알면서도 소스코드를 넘겨줬다고 했다. 어느새 길들여진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에게 B사의 소스코드를 넘겨주면서 상용 서비스로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허망한 웃음이 나더군요. 우리가 당한 것과 똑같은 일인 겁니다. 그걸 만들어주면 당장 몇천만원, 몇억원이 용역개발비로 떨어지는데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으로서 참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지요."
그러나 과거 수차례 '당했던' 기억이 생생한 A 사장은 결국 통신사의 그 제안을 거절하고 기술 보유자인 B사에 진실을 알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다고 했다.
A사장과 달리 대기업으로부터 '기술 훔치기'를 당했을 경우 직접 소송에 나서는 중소벤처기업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분쟁의 결과는 참담하다. 최근 6년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특허분쟁 가운데 중소기업이 승리한 것은 39%에 그친다.
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생각하면 (대기업 쪽이)옳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수한 법무팀을 가동하는 대기업과 영세한 중기벤처 사업자들의 법정 다툼은 옳고그름을 떠나서 싸우나마나 한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제안서에 적어낸 아이디어도 발주사 소유"
대형 통신사의 기술 훔치기는 현재진행형으로 보인다. D통신사가 제시한 '입찰제안요청서(RFP)'를 보면 대기업 통신사가 노골적으로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채는 방법이 나타난다.
'제출된 제안서는 당사의 자산이 되며, 제안서는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입사원서든, 입찰제안서든 한 번 제출한 서류를 돌려주지 않는 곳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제안서 '서류'를 돌려주지 않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제안서 자체가 D통신사의 자산이 된다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중소기업이 힘들여 개발, 제안서에 꼼꼼하게 적어놓은 아이디어나 기술이 D통신사의 '자산'으로 고스란히 넘어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안서에서 제시한 아이디어는 모두 D통신사의 소유가 됩니다. 그나마 이건 문장의 수위가 좀 '개선'된 겁니다. 불과 2~3년 전엔 더 노골적인 내용이 제안서에 있었어요."
그가 찾아준 다른 서류에는 '제출한 제안서는 최대 00일까지 다른 곳(다른 통신사)에 제출할 수 없습니다. 제출된 제안서에 포함된 내용은 당사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안서 내용을 외부에 공개할 시 당사가 계약을 임의로 파기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E 임원은 "문제제기요? 이제는 너무 당연한듯 익숙해져서 우린 그러려니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철저히 '을(乙)'로서, 그들(통신사)의 입맛대로 움직여야 하니까, 이제 이런 데 별다른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바꿔 말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돼 개발해 준 기술은 당연히 발주 회사의 자산이 되는 것이며, 제안서 평가에서 떨어진 아이디어조차 통신사가 가로채고 있는 구조인 것이다. 그럼에도 E 임원은 "이조차도 못하고 굶어죽는 업체를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우리는 불쾌한 내색도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러한 일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적지만, 업계에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솔루션 업계 한 관계자는 "스마트폰이 뜨면서 앱이나 게임 같은 일부 분야에서야 통신대기업도 많이 바뀌었다지만, 드러나지 않는 기술협력 등에서는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지난 1월중순 하성민 SK텔레콤 총괄사장은 취임 첫 기자간담회에서 경영방향으로 '스피드'와 '개방', '협력'을 3대 키워드로 내세웠다. 그는 "개별 기업의 내부 역량만으로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면서 개방형 협력을 통한 동반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석채 KT 회장은 이달 초 '동반성장을 통한 미래도약'을 주제로 IT CEO 포럼 조찬세미나를 개최하고 거래실적이 있는 협력사에 약 1천건의 보유특허를 무상 양도, 특허를 활용할 수 있도록 조치한 사실을 공개했다.
대기업들의 발표에도 생태계 회복을 위한 동반자적 관계개선이 이뤄질지에 대해선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업계 한 관계자는 "CEO들이 상생의 경영철학을 얘기한다고, 실무자들이 그대로 따라갈 것이라고 믿어선 안된다"며 "세부 플랜과 상생의 실적을 정기적으로 공개해 중소벤처기업들과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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