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하(일본 통신원)]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전자책 시장 규모는 2008년까지만 해도 미국의 약 4배 정도 규모로 세계 최대의 전자책 대국이었다. 2008년 기준으로 미국 시장이 157억엔 규모였던데 비해 일본의 전자책 시장 규모는 약 637억엔에 달했다. 이것이 킨들과 iPad가 등장하면서 미국 내 전자책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2009년 이후로는 미국 시장이 일본 시장을 크게 앞서고 있다.
일본의 전차책 시장은 상당히 역사가 깊은 편이다.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대형 출판사들이 웹사이트를 통해서 자사 콘텐츠의 일부를 공개하는 등의 서비스를 시작해왔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전자책 서비스가 시작된 것은 1999년의 일로 당시 일본 최대의 인쇄 기업인 TOPPAN에서 ‘빅웨이트’라는 서비스를 시작하면서다. 빅웨이트는 일본의 주식회사 보이저(VOYAGER)에서 개발한 전차책 포멧인 EBK 기술을 이용해 전용리더 T-time 기반의 서비스를 개시했다.
컴퓨터 활용도가 낮은 일본인들의 특성상 빅웨이트 서비스는 처음에는 고전을 했지만 2003년 KDDI와 제휴로 휴대폰 만화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2004년에는 NTT와 보다폰(현: 소프트뱅크), 2005년에는 야후!BB를 통한 웹 브라우저 기반의 서비스까지 오픈하면서 전자책 시장은 만화 컨텐츠를 중심으로 일본의 대중적인 출판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의 전자책 시장은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올해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잉크와 종이가 부족해 책의 재판을 인쇄하지 못하는 등의 사태를 겪으면서 출판업계 전체가 전자책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현재 업계에서는 2014년까지 일본 내 전자책 시장이 약 1천300억엔(약 17조9천억)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만화, 잡지 중심의 전자책 시장 현재 일본의 전자책 시장의 핵심 콘텐츠는 누가 뭐라고 해도 만화다. 일본 최대의 전자책 사이트인 이북저팬(www.ebookjapan.jp)의 경우 메인 페이지의 대부분이 만화로 도배되어 있다. 종수에서도 매출에서도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휴대폰 이북 서비스에서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만화와 젊은 여성 대상의 ‘휴대폰 소설’ 등이다. 이것은 비단 전자책 뿐만 아니라 일본 출판시장 전반적인 구조가 그렇다.
일본은 출판시장 매출의 대부분을 만화와 잡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파이가 큰 만화 쪽이 가장 먼저 전자책 시장이 활성화 되었고, 현재는 전자책으로만 발행하는 만화잡지도 수십 종이 넘는 상황이다.
잡지의 경우는 만화에 비해서 전자책 판매가 상당히 뒤쳐졌는데, 가장 큰 문제는 잡지 업계의 지나친 프라이드와 고전적인 편집 방식을 고수하려는 보수성, 여기에 광고 매출 감소에 대한 불안 등 복잡한 문제들이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소규모로 잡지를 전자책으로 서비스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일본 내에서 잡지의 전자책 서비스가 본격화 된 것은 소프트뱅크의 Viewn(븅) 서비스가 시작되면서다.
이 서비스는 소프트뱅크가 설립한 ‘주식회사 븅’이 운영하는 어플리케이션 Viewn(븅)을 이용해 스마트폰과 휴대폰 등으로 월정액 450엔에 일본의 주요잡지 거의 대부분을 구독할 수 있는 획기적인 서비스다. 아이패드의 일본 발매와 더불어 2010년 6월1일부터 서비스를 개시했으나, 당초 예상보다 너무 많은 사용자가 몰리면서 서버 장애가 발생해 오픈한지 3시간 만에 서비스를 중단, 거의 한 달 후인 6월29일부터 Wi-Fi 환경 한정으로 사양을 변경해 임시 재개를 했다가 8월16일에 되어서야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븅 서비스는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제공되는 잡지의 모든 콘텐츠를 븅 서비스에서 볼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주간 다이아몬드>
사진 작가와의 계약 문제, 해당 연예인의 기획사와의 관계 문제 등 복잡한 저작권 문제 때문에 본지에 실렸던 사진이 전자책판에는 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렇게 사진이나 일부 기사가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디지털이라서 쉽게 복사가 되어 콘텐츠의 가치가 떨어진다”라는 낡은 고정관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또 패션 잡지의 경우는 대부분의 기사를 도입 부 몇 페이지만 소개하고, 정작 독자들이 원하는 코디된 모델들의 사진 목록 같은 것들이 죄다 빠져 있기 일수다. 결국 븅 서비스는 잡지의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초기 서비스에 참여했던 패션잡지 대부분이 콘텐츠 제공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븅에서 이탈한 상황이다.
또 한가지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븅은 특정 기간에 걸쳐서 제공하는 콘텐츠만을 볼 수 있을 뿐 콘텐츠의 저장이 안 되고, 잡지의 백넘버를 볼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잡지를 월정액으로 보여주지만 어디까지나 스트리밍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굳이 이 서비스 뿐만이 아니라 일본 대부분의 유료 웹 콘텐츠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후 DVD나 단행본 등 2차 상품화를 위한 조치다. 하지만 사용자에게 2중으로 과금을 한다는 점도 문제지만, 이런 식으로 기간이 지난 콘텐츠의 대부분이 다시 상품화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점이 더 큰 문제로 지적된다. 결과적으로 “콘텐츠를 보존하고 싶으면 잡지를 돈 내고 사라”라는 이야기다.
여기에 광고 집행의 주최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까지 겹치기 때문에 페이퍼 미디어를 디지털로 제공하는데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재해 있다.
물론 븅 서비스에 긍정적인 면도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평가 받는 것이 종이 잡지에서는 일부가 흑백으로 인쇄된 잡지도 븅에서는 올컬러로 서비스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편집에 있어서 흑백이나 컬러의 제작 단가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쇄를 한다면 비용 절감을 위해서 흑백 페이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전자책에서는 올컬러여도 전혀 부담이 없다. 이 점이 어필되어 븅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독자들도 많다고 한다.
1차 저작권자들의 자발적인 시장 참여
출판사들의 보수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전자책 시장이 확대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오히려 1차 저작권을 갖고 있는 작가들이다. 생각이 깨어 있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출판 업계의 나눠먹기식 구조를 깨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기 만화가 ‘아카마츠 켄’ 씨가 직접 대표를 맡은 ‘J코믹’이라는 사이트다.
아카마츠 켄 씨는 자신의 과거 인기 만화를 J코믹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PDF로 다운로드 해서 저장할 수 있게 하며, 유저로부터 요금을 일절 받지 않는다. 대신 PDF 형식으로 만들어진 단행본에는 페이지 사이 사이에 배너 형식의 전면 광고가 삽입되어 있다. 이 광고를 통해 작가 본인에게 수익을 쉐어해주는 사업모델을 내세웠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 단행본 한 권에 한 달 50만~60만엔 정도의 매출을 올리면서 J코믹은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이미 출판사와 계약이 끝난 자기 작품을 J코믹을 통해 서비스하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소설가나 넌픽션 작가 사이에서는 아직 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다. 만화 업계와는 달리 소설이나 저널리즘 시장은 일본의환경상 미디어에 밉보였다가는 더 이상 원고를 받아줄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작가 스스로가 나서서 행동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은 늘 마이너한 시장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데, 출판시장도 마찬가지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본이 나온 <만약 고교야구의 매니저가 드래커의 경영을 읽는다면…>라는 소설은 일본에서 250만부가 넘는 대히트를 기록했는데, 그중 50만부 가량이 전자책 판매였다고 한다. 갑자기 화제가 되어 읽고 싶지만 서점에서는 공급이 부족해 전자책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전자책은 가격도 인쇄물의 2/3 정도에 불과해서 중고책보다도 쌌기 때문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콘텐츠를 돈을 내고 구입한다는 의식이 강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똑같은 내용의 컨텐츠를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매력은 고정관념을 바꾸게 하기에 충분한 장치일 것이다.
독자 스스로가 디지털화에 나서 아이패드 출시 이후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는 것 중 하나가 자가디지털화다. 즉 자신이 갖고 있는 책을 모두 분해해서 직접 스캔하여 PDF파일로 만들어 자기 아이패드에 넣고 보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대부분 상당량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만화책, 잡지 등을 일상적으로 사기 때문에 누구 집에 가던지 박스 3~4개 분량의 책은 쉽게 나온다. 하지만 이 책들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도 사실이다. 가뜩이나 집이 좁은 일본에서 책은 늘어날수록 골치덩어리인데, 이런 사람들이 아이패드를 구매한 뒤 자동급지장치가 있는 ‘도큐먼트 스캐너’와 책 절단기 등을 구입해 직접 스캔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일본 양판점에는 아예 이런 전자책화 장비들을 판매하는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다.
출판대국 일본, 전자책 시장 대국으로의 길
요즘은 일본에서 아이폰 무료 어플을 이용하다보면 구글 모바일 광고에 찍혀 나오는 광고의 3할 정도가 전자책 광고일 정도로 전자책에 공격적으로 뛰어드는 기업들이 많다. 하지만 대형 출판사와 인쇄회사, 그리고 총판이 수십년 동안이나 굳건하게 지켜오던 이권을 쉽게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보수적인 업계 분위기가 전자책 시장을 ‘유효 사용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마케팅 수단’ 혹은 이미 종이책으로 판매가 시작된지 오래 되어 유통비용이 생산비용보다 부담되는 낡은 콘텐츠의 사후활용 정도에 묶어두고 있다.
/김상하(일본 통신원) [email protected]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