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글로벌 소프트웨어 업체의 임원과 지사장을 두루 지냈던 분이 올해 새롭게 사업을 시작했다고 해 서초동 사무실을 찾았다. 아담한 사무실에 자리잡고 있는 이 벤처는 직원이라야 여남은 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신생 벤처엔 부사장만 두 명이나 된다. 그 중엔 국내 유서깊은 제조기업의 최고정보책임자(CIO)를 역임했던 사람도 있다.
사장은 쑥쓰러운듯, 하지만 의미있는 미소를 머금고 소개한다. "구성원이 좀 늙었죠? 우리는 '늙은 벤처'거든요."
자연히 '늙은' 인재를 필요로 하는 기업은 더 적다. 명퇴니, 사오정이니 하는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더 저렴한(?) 연봉에 더 열정적으로 일하는 젊음을 이길 노장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젊은 패기로도 결코 따라집지 못하는 것이 있다. 노장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개발 경험과 IT 현장에 대한 전문성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기자는 한 닷컴업체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만났다. 그는 외국에서 오랜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국내 IT 업계와 외국 업계의 큰 차이를 알게 됐다고 한다.
"외국에도 젊고 천재적인 개발자들이 많지만 한국 IT 회사 조직원들은 정말 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국 IT 업체들은 젊은 조직원들 사이에도 일명 'GOD'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기 마련인데, 한국에는 그런 분들이 전혀 없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는 새하얗게 세어버리고 눈은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할아버지들이 한 두 명씩은 꼭 있는 데, 이들이 바로 'GOD'이다. 이 사람들은 이사도 아니고 부사장도 아니다. 명함을 보면 그냥 '개발자' 혹은 '아키텍트'가 전부다.
젊은 개발자들이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을 개발하다가 난관이 부닥치면 GOD을 찾아간다. 그러면 이 할아버지들은 안경을 고쳐쓰고 손을 떨면서도 막힌 시스템 설계를 척척 풀어간다. 현장 개발의 장애물도 GOD의 지혜로 풀어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GOD, 신적인 존재로 통한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 나이에도 변변한 임원을 달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IT 업계와 현장을 떠나는 백전노장 IT맨들. 그리고 그 노장을 잡지 못하는 기업들에게 진한 아쉬움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IT 강국이란 말이 무색하게 번듯한 원천 기술 하나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정작 현장을 두 발로 뛰어다니며 살아있는 IT 개발 경험을 축적한 '늙은' 개발자를 홀대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서초동 신생 벤처 사장이 회사를 '늙은 벤처"라 칭한 것은 퇴직 임원들이 모여 바둑이나 두고 옛 이야기나 나누려 모인 집단이라는 뜻이 아니다. 제조, 금융, 공공 등 산업 일선에서 직접 IT 기술을 적용하고 문제를 해결해 왔던 백전노장들이 그 경험을 살려 다시 한번 도전하겠다는 의미에서 '늙은 벤처'라 소개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임원 타이틀이나 높은 연봉이 아니었다. 평생을 쌓아온 지식 재산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함께 활용해나가자는데 뜻을 같이해 소매부리를 걷었던 것이다.
기자도 이 회사의 사업 향방이 어떻게 될 지 자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늙은 IT맨'의 가치를 아는 이 벤처회사가 부디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그 취지를 온 업계에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강은성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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