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 971킬로그램에 달했던 캐비닛 크기의 초기 HDD는 현재의 디지털 음악 한 곡을 담을 수 있는 용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크기 1인치 무게 13g의 HDD에 2천 곡(곡당 4메가바이트 기준)을 저장할 수 있다."
컴퓨터의 역사에서 저장장치의 대명사 격인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HDD).
HDD가 12일로 개발된지 50년을 맞았다. 초기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저장장치로 등장한 HDD는 지금도 PC는 물론, 각종 가전기기와 자동차에까지 쓰이며 인류가 만들어 낸 데이터를 담아 저장하는 '그릇'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HDD의 발전사는 'IBM과 씨게이트의 경쟁'과, '제품 크기 축소와 용량 확장'이라는 두 가지 흐름으로 요약된다. 탄생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대표적 저장매체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HDD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
◆ HDD 원조 '라막'의 탄생과 IBM-씨게이트의 각축전
최초의 HDD는 지난 1956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IBM 연구소에서 개발한 디스크기반 스토리지 '라막(RAMAC, Random Access Memory Accounting Maching)'이다. '라막'은 대형 컴퓨터를 만들던 IBM이 이와 연동될 주변 기기를 개발하면서 내놓은 제품이었다. 당시 데이터 저장에 주로 사용됐던 자기드럼이나 테이프, 천공카드를 대체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
'라막'은 0.3인치 간격으로 배열된 직경 24인치, 두께 0.1인치의 알루미늄 디스크 50장이, 1분당 1천200회(1200 RPM)의 속도로 회전하며 정보를 저장하도록 고안됐다.
오늘날의 대형 복사기 정도의 덩치를 가지고 있던 '라막'의 총 용량은 4.4메가바이트(MB). 이는 현재의 디지털 음악 한 곡 정도를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다.
주목되는 점은 '라막' 개발의 책임자였던 알렌 슈가트가 현재 세계 1위 HDD 생산업체로 성장한 씨게이트를 설립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디스크 스토리지를 처음 개발한 것은 IBM이지만 용도를 다양화할 수 있도록 HDD를 만들어 IBM PC에 탑재한 것은 씨게이트. 때문에 HDD 대중화와 맞물리는 씨게이트의 성장 역사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1972년 '슈가트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하고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생산에 들어간 후 보인 슈가트의 행보를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PC 출시 전, 큰 덩치와 높은 가격이라는 HDD의 '아킬레스건'만 극복하면 상업적 가능성이 있다고 슈가트는 판단했다. 실제로 1979년 씨게이트를 설립하고 비슷한 시기 등장한 IBM PC가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자 HDD를 공급하던 씨게이트의 시장 입지도 급속히 확대돼 갔다.
1980년대 들어 PC가 큰 호응을 얻자 IBM은 1973년에 '윈체스터 디스크 드라이브'를 개발한 이후 중단했던 HDD 생산에 다시 들어가고, 씨게이트에 대한 주문량을 대폭 줄이는 등 씨게이트에 대한 전방위 견제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씨게이트는 이 같은 위기를 인건비 절감과 싱가포르에 대한 생산 거점 마련을 통해 돌파한다. 또 저가 시장 집중 공략과 같은 다양한 마케팅 정책으로 세계 시장에서 입지를 넓혔다. 이후 이어진 몇 번의 위기에도 씨게이트는 지속적인 시장 개척 노력을 이어갔다. 지난해 성사된 업계 3위 업체 맥스터와의 합병으로 세계 시장 1위 자리를 더욱 굳혀가고 있다.
한편 지난 2003년 1월 탄생한 히타치 글로벌 스토리지 테크놀로지(히타치GST)의 행보도 눈길을 끈다. 이 회사는 HDD 원조 업체 IBM의 스토리지 기술부문과 히타치의 HDD 부문이 합병돼 만들어졌다. 지난 1967년 최초의 메인 프레임 컴퓨터 저장 서브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IBM과 경쟁했던 히타치의 이 같은 행보는 앞으로 시장에 적지 않은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전망된다.
히타치GST는 현재 1인치, 1.8인치, 2.5인치, 3.5인치 HDD 등 광범위한 제품군을 공급하고 있으며 4천500건의 특허 기술을 무기로 적극적인 시장 공세를 펼치고 있다.
◆ 크기는 줄이고 용량은 늘려라!...헤드-플래터의 '거리 좁히기'
업체 간 각축전 만큼 기술 개발의 역사도 흥미롭다. 지난 50년간 HDD는 작은 크기와 큰 저장용량을 구현하는 데 기술 개발의 초점이 맞춰졌다.
최초의 HDD였던 '라막' 한 장의 플래터에는 100킬로바이트(KB)의 정보를 담을 수 있었다. 최근의 HDD들이 100기가바이트(GB) 플래터를 채택하는 걸 감안하면 저장용량 격차가 100만 배에 달하는 셈. 플래터 면적을 고려한 표면밀도까지 감안하면 현재의 HDD는 '라막'보다 약 3천500만 배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AT컴퓨터에 40MB급 HDD가 장착될 경우 이는 최고 사양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이후 윈도3.1, 윈도95, 윈도 98, 윈도 XP와 같은 운영체제가 등장하면서 PC에 필요한 HDD의 용량은 계속 커져만 갔다.
2000년 초까지 노트북에 사용되던 HDD의 용량은 5GB 내외까지 늘어났다. 데스크톱도 10GB면 적은 용량이 아니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보 저장 수준의 비약적 확대가 있었던 셈이다. 이후 인터넷보급의 확대와 각종 디지털 미디어 파일의 등장은 HDD의 용량을 계속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최근의 PC에는 100GB HDD가 장착되는 것이 흔한 일. 주요 업체들은 500GB의 벽을 넘은 제품도 내놓고 있고 이제 1테라바이트(TB)급 제품의 등장도 머지 않은 상황이다.
데이터 저장 밀도의 증가는 이 같은 HDD 저장 용량 증대와 맥을 같이 한다. HDD의 저장밀도는 헤드와 플래터 사이의 거리를 극도로 가깝게 한 데서부터 출발한다. 일정 간격을 두고 떠 있는 헤드와 플래터간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정밀한 기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점은 헤드와 플래터의 거리가 좁아지자 플래터의 평활도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플래터가 얼마나 일정하게 매끈한가에 따라 헤드의 접근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
그러나 헤드와 플래터 사이를 좁히는 것도 무한정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줄어드는 자성체의 양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열에 대한 안정성을 급격히 잃게 되고, 이는 저장된 정보의 파괴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이를 '초상자성 효과'라고 부르는데 이 때문에 1970년대 IBM 기술자들은 종방향 기록방식에서는 1제곱 인치미터당 20기가비트의 저장 밀도를 돌파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 수직자기기록 방식 부상...작게 더 작게
수평기록 방식을 통한 저장용량 증대가 한계에 이르자 해결책으로 최근 떠오른 것이 수직자기기록(PMR) 방식이다. 수평방향만으로 기록되던 데이터 저장방식을 수직방향으로 바꾸면 주어진 공간에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기 때문.
신소재와 헤드 기술의 개선을 통해 한동안 수평기록 방식에 만족하던 HDD 업체들은 정보량의 폭발적 증가를 감당하0기 위해 수직자기기록방식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에 주력한 업체가 씨게이트.
수직기록방식 덕에 HDD 밀도는 비약적으로 향상됐으며 최근 이어지는 디지털 콘텐츠의 폭발적 증가에도 사용자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수직기록방식은 낸드플래시의 등장에 따라 저장장치의 지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HDD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 되고 있기도 하다.
HDD 크기가 축소되고 용량은 증가하면서 HDD를 사용하는 제품은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PC 뿐 아니라 MP3플레이어 아이팟, 디지털 TV, 디지털카메라, PMP, 내비게이션, 셋톱박스 등에 내장된 HDD는 우리의 디지털 라이프를 더욱 윤기 있게 해주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HDD의 소형화가 톡톡히 한 몫 했다.
최초의 디스크스토리지 '라막'에 사용된 디스크의 크기는 24인치에 이르지만 현재 노트북에 주로 쓰이는 HDD의 크기는 2.5인치에 불과하다는 점이 이를 웅변한다. 게다가 아이팟 미니와 같은 MP3플레이어나 디지털카메라에 쓰이는 마이크로드라이브는 1인치대 제품이다. 도시바의 경우 무게 13그램에 저장용량 1.5기가바이트에 달하는 0.8인치 제품까지 개발한 상태다.
히타치GST 관계자는 "1제곱 인치당 1테라바이트를 능가하는 데이터 밀도가 실현되어 수 테라바이트의 모바일 드라이브와 80기가바이트를 초과하는 마이크로드라이브가 개발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HDD의 새로운 수요처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호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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