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우리 집에선 퇴출 당한 양반입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지난 2012년 4월 24일 오전 7시경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에 대해 맹비난했다. 전날 이 명예회장이 법무법인을 통해 "건희가 어린애 같은 발언을 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됐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그 양반(이맹희 명예회장)은 30년 전에 나를 군대에 고소하고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했다"며 "아버지를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했던 양반"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나를 포함해 누구도 (이맹희 명예회장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며 "이 사람이 제사에 나와 제사 지내는 꼴을 내가 못 봤다"고 지적했다.
7일 재계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이맹희 명예회장을 향해 이처럼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낸 것은 '승계'와 관련해 오랜 기간 앙금이 쌓였던 데다 수 조원대 상속 분쟁까지 불거졌던 탓이다. 이맹희 명예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장남으로 이건희 회장의 형이자,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부친이다. 삼성 그룹 경영에서 물러난 지난 1973년 이후 이건희 회장과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았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과 CJ그룹 간 대립은 삼성그룹의 '장자승계' 원칙이 깨졌기 때문"이라며 "삼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경영권을 물려 받으면서 갈등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그룹의 한국비료가 사카린 원료를 밀수하다가 부산 세관에 적발됐고 삼성은 당시 2천400만원의 벌금을 냈다. 이로 인해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재계를 은퇴했다.
이후 장남인 이맹희 명예회장이 삼성그룹의 후계자에 올랐다. 이건희 회장은 1966년 첫 직장을 동양방송을 택하며 당시 방송 쪽을 맡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청와대 투서 사건이 불거지면서 이맹희 명예회장이 투서의 주범이란 오해를 사게 된 것이다.
결국 이맹희 명예회장은 왕좌의 자리를 이건희 회장에게 물려줬다. 청와대 투서 사건은 이병철 창업주의 차남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 이병철 창업주를 구속시켜달라는 편지를 청와대에 보낸 사건으로, 이 과정에서 이맹희 명예회장이 이를 방관 또는 가담해 이병철 창업주의 눈밖에 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그룹의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에게 넘어가자 이맹희 명예회장은 야인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병철 창업주가 남긴 재산을 둘러싸고 지난 2012년 2월 이맹희 명예회장이 여동생 이숙희 씨 등과 함께 이건희 회장 등을 상대로 4조원대 주식인도 청구 소송을 내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이맹희 명예회장의 조카 며느리인 최선희 씨와 최 씨의 두 아들도 당시 소송에 참여했다.
소송은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1, 2심에서 이맹희 명예회장 측의 완패로 끝났다. 이후 2014년 2월에 이맹희 명예회장의 상고 포기로 소송은 마무리됐지만, 이 시기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미행 사건까지 터지면서 삼성그룹과 CJ그룹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CJ그룹은 조직적으로 이 회장을 미행한 삼성 계열사 직원들을 고소했다. 그러나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인근의 선영 참배를 놓고 갈등을 빚은 것이다.
이건희 회장과 이맹희 명예회장의 관계도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이건희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데다 이맹희 명예회장이 2015년에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이건희 회장도 2020년에 별세했다.
두 그룹 간 최악의 상황으로 흐르던 관계는 지난 2014년 8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은 이재현 회장의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범삼성가에서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진정됐다. 탄원서 제출자 명단에는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이 포함됐다.
다만 두 집안의 갈등 해소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2015년 8월부터다. 중국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이맹희 명예회장의 유해가 한국에 들어와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자 이재용 회장이 홍 전 관장,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과 함께 빈소를 찾은 것이다.
2018년에는 CJ그룹이 삼성 출신인 박근희 CJ대한통운 부회장을 영입하며 두 그룹 간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개선됐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박근희 부회장의 영입 전 이재현 회장이 이재용 회장에게 사전 양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박 부회장은 "삼성과 CJ 가교 역할을 하겠다"며 "이제 본격적인 화해 무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2020년 10월 고 이건희 회장의 빈소에 이재현 회장이 친인척 가운데 가장 먼저 찾은 것도 두 집안의 화해 무드가 절정에 달했음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재현 회장은 당시 고 이건희 회장의 별세 소식을 접하자마자 빈소도 제대로 차려지지 않은 장례식장을 찾아 1시간 30분가량 자리를 지켰다. 또 이건희 회장에 대해 "국가 경제에 큰 업적을 남기신 위대한 분이고 가족을 무척 사랑하셨고 큰 집안을 잘 이끌어주신 저에게는 자랑스러운 작은 아버지"라며 "일찍 영면에 드셔서 황망하고 너무 슬프다"고 추모했다.
지난해에는 이재용 회장 등 이건희 회장 유족들이 약 12조원에 이르는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이 회장 소유 주택과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서울 장충동1가 소재 저택을 이선호 CJ제일제당 식품성장추진실장에게 매각해 눈길을 끌었다. 이 실장은 이재현 회장의 장남이자 이병철 창업주의 증손자다.
재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 유족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매입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삼성가 종손인 이선호 실장에게 넘긴 것으로 보인다"며 "이건희 회장과 이맹희 명예회장의 앙금을 씻어내겠다는 의지를 유족들이 부동산 매매를 통해 보여준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 외에 CJ문화재단은 지난해 4월에도 삼성가 유족들로부터 이건희 회장이 장충동에 소유하던 또 다른 저택을 기증 받았다. 이병철 창업주가 작고 전까지 살았던 삼성가의 종가 같은 곳으로, 이재현 회장도 1996년까지 이곳에서 산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최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6일 고 손복남 CJ그룹 고문 빈소에 친인척 중 가장 먼저 찾으면서 여러 해 동안 지속되던 양가 갈등은 완전히 해소된 분위기다. 이날 조문에는 홍라희 전 관장도 함께 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재현 회장과 이재용 회장 사이는 원만한 것으로 안다"며 "두 그룹 모두 3세 시대가 본격화 되면서 양가의 화해 분위기는 계속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유미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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