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손정의(마사요시 손)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예정대로 만남을 추진하면서 영국 반도체 설계자산 회사 'ARM' 관련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분위기다. 앞서 두 사람이 이와 관련해 만남을 예고한 가운데 이 부회장이 인수합병(M&A)에 나설 지, 지분 투자를 진행할 지를 두고 재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3일 재계에 따르면 손 회장은 지난 1일 오후 3시 50분께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ARM을 두고 이 부회장과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ARM은 지난 2016년 손 회장이 소프트뱅크와 자회사 비전펀드를 통해 인수했다. 지분율은 소프트뱅크그룹이 75%, 소프트뱅크비전펀드가 25%다.
그러나 2021년부터 이어진 저조한 투자 실적 여파로 ARM을 시장에 다시 내놨다. 실제로 소프트뱅크비전펀드는 지난해 3분기에만 1조6천70억 엔 손실을 냈다. 지분 20.1%를 보유한 중국 자동차 공유업체 디디추싱의 주가 하락으로만 약 4조5천억원을 손해봤고, 1조원을 투자한 인공지능(AI) 안면 인식업체 센스타임도 미국 정부의 제재로 홍콩 상장이 지연되면서 손실 규모를 키웠다.
이에 소프트뱅크는 ARM 매각으로 이를 만회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앞서 엔비디아가 400억 달러(약 56조원)에 ARM을 단독 인수하려고 했지만, 지난 2월 초 미국, 영국, 유럽연합(EU)의 규제 당국의 저항으로 무산됐다.
업계 관계자는 "ARM이 차지하는 독점적 지위 때문에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지 못했다"며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할 경우 기존에 받던 로열티를 크게 올리거나, 엔비디아의 경쟁사에는 ARM 설계도를 제공하지 않는 등의 독과점 행위가 발생할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 설계를 하는 기업들에 설계도(IP)를 판매하며 수익을 얻는 ARM을 한 기업이 독점하면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며 "ARM이 반도체 생태계에서 갖고 있는 독특한 입지를 고려하면 전 세계 규제 당국의 승인을 끌어내기 위해선 지분 공동 인수를 추진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업계에선 ARM 인수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이 반도체 사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곳이 대부분이란 점에서 향후 매각도 쉽지 않다고 봤다. 다시 매각을 추진해도 규제에 막혀 거래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소프트뱅크그룹 역시 자금 확보 방안으로 매각 대신 기업공개(IPO)로 계획을 바꿔 추진해왔다.
그러나 IPO 작업도 순탄치 않은 상황이다. 내년 3월 말까지 ARM을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영국 런던증권거래소 등에 상장을 추진했지만, 최근 미국 기준금리 인상 여파로 시장 불확실성이 커져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또 소프트뱅크의 계획과 달리 영국 정부가 런던증권거래소 우선 상장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손 회장은 점차 재무 상황이 나빠지자 삼성전자, SK 등과 접촉하며 ARM 출구 전략을 다시 짜는 분위기다. 소프트뱅크는 최근 잇따른 투자 실패로 올해 상반기에만 약 500억 달러(약 70조원)의 적자를 기록, 이를 만회하기 위해 기존 투자자산 매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상태다.
이 같은 상황 속에 재계에선 손 회장의 이번 방한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손 회장뿐 아니라 이 부회장이 ARM과 관련해 만날 것을 직접 예고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 부회장은 지난달 21일 중남미와 영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 달에 손정의 회장이 서울에 온다"며 "아마 그때 무슨 제안을 할 것 같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후 손 회장 역시 곧바로 "삼성과 ARM 전략적 협력 논의를 위해 한국을 찾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번 만남을 통해 삼성전자가 ARM을 단독 인수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의 중론이다. 또 삼성전자가 공동인수를 할 경우도 ARM에 대한 일부 지분만 확보돼 다른 기업들과의 관계에 따라 실질적인 설계 등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단 지적이다. 구성원과의 이해관계 때문에 파운드리 사업에 부담을 줄 위험이 크다는 판단이다.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 사례에서 볼 수 있듯 ARM은 개별 기업이 인수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며 "ARM의 고객사인 퀄컴·인텔 등과 복잡한 구도로 얽힌 삼성전자가 얻을 수익이 잃을 기회보다 크지 않다는 점에서 컨소시엄 M&A 확률도 적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삼성은 2016년 전장업체 미국 하만 인수 이후 현재까지 대규모 M&A가 중단된 상태"라며 "그동안 삼성전자에만 120조원이 넘는 현금이 쌓이면서 신성장 동력을 위한 M&A가 필요하다는 주문이 계속돼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TSMC를 단기간에 따라잡기 보다는 시스템 반도체 설계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ARM 인수가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이루는데 더 빠른 실행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현재 설계(시스템LSI사업부)와 위탁생산(파운드리사업부)를 동시에 진행하는 삼성 입장에서 ARM을 수직계열화하는 것은 부담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ARM의 몸값이 너무 높다는 점도 부담 요소로 꼽힌다. 업계에선 ARM의 기업 가치가 50조원에서 최대 10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술 기반 프로세서 시장에서 점유율 90%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매물이긴 하지만, '독과점' 문제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ARM의 매출은 27억 달러(약 3조9천억원) 수준이다.
이에 재계에선 삼성전자가 ARM의 지분을 취득해 전략적 협력 관계를 강화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다. 삼성전자가 지난 2012년 ASML에 투자해 3% 지분을 확보한 사례나, 삼성디스플레이가 미국 코닝과 지분을 교환해 지분 9%를 확보하며 2대 주주에 올랐던 사례처럼 일부 지분 확보와 함께 경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장기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방안이 유력하다는 관측이다.
재계 관계자는 "협력 강화 차원에서 삼성전자가 ARM의 상장 전 지분투자(프리IPO)에 참여하는 형태로 나설 수도 있다"며 "양사 논의는 삼성전자의 ARM 지분 투자에 국한될 듯 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현재 삼성이 파운드리에 지속 투자해야 할 시기에서 ARM 인수에 큰 돈을 쓸 여유가 없어 보인다"며 "전략적으로 지분을 투자하는 방안이 가장 유력해보인다"고 말했다.
더불어 손 회장이 다급한 상황에 놓인 만큼 이번 방한에서 SK 경영진과도 접촉할 가능성이 높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가 주력인 곳으로, ARM IP를 통한 라이선스 사업 모델을 추가해도 고객사 등과 부딪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입장이 다소 다르다. 이 외에 팻 겔싱어 인텔 CEO(2월), 크리스티아누 아몬 퀄컴 CEO(5월) 등도 ARM 공동 인수 추진에 대해 공개적으로 관심을 드러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 3월 "ARM을 어느 한 기업이 독점하게 되면 반도체 생태계에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ARM 인수합병을 위해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유미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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