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이 전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계 1위인 대만 TSMC를 끌어들여 시장 내 존재감 키우기에 본격 나섰다. 반도체 자립과 경쟁력 강화가 국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대만 TSMC는 최근 일본 구마모토현에 파운드리 생산라인을 건설하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설 공장에는 16나노미터(㎚, 1nm=10억분의 1m)와 28나노 공정이 도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2월 일본 이바라키현 츠쿠바시에 '패키징'에 초점을 맞춰 연구개발(R&D) 거점을 신설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생산라인까지 세울 경우 TSMC의 파운드리 독주체제는 더 공고해질 전망이다.
또 일본의 반도체 시장 내 입지도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일본 정부는 츠쿠바시 반도체 연구개발 시설 건설을 위해 TSMC에 약 190억 엔(한화 2천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키로 한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TSMC의 신설 공장이 5나노급 이하 첨단 미세화 공정은 아니지만 자동차, 스마트폰 등 최근 공급 부족 사태가 심화하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물량을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일본 소니나 주요 자동차 대기업들을 상대로 반도체칩을 납품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TSMC와 손을 잡게 된 것은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해 시장 내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서다.
일본은 그동안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낸드플래시 생산과 관련해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파운드리 등 반도체 생산과 관련해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또 지난 2019년 말 파나소닉이 대만 누보톤에 반도체 관련 지분을 모두 넘긴 데다 키옥시아 지분 매각,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 적자 전환 등 반도체 산업에서 계속된 악재가 이어지면서 업계 전반이 침체기를 겪었다.
특히 전체 물량의 64.2%를 수입할 정도로 반도체의 해외 의존도가 높았던 것은 경쟁력 강화에 걸림돌이었다. 이 탓에 일본 정부는 지난 3월 해외 위탁생산에 의존하던 첨단 반도체를 오는 2025년부터 자국에서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이 내년도 경제정책에도 국내외 반도체 관련 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명시할 정도로 자국 내 공급체계 구축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며 "미국, EU 등이 수십조원을 들여 반도체 업체들을 유치하기 위해 나서자 이에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반도체가 국력인 시대에 돌입한 만큼 미국, 유럽, 중국 등 각국에서 반도체 공급망 복원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역시 위기 의식을 느끼고 TSMC에 적극 구애를 한 듯 하다"며 "다만 TSMC를 통해 자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력을 얼마나 키워나갈 수 있을지가 관 건"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일본이 TSMC와의 관계를 강화하자 업계에선 긴장감을 높이며 예의주시하고 있다. 일본이 소재와 부품, 장비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TSMC와의 시너지가 클 것으로 판단해서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TSMC는 상대적으로 반도체 후공정 분야에서 경쟁력이 취약해 재료 및 가공 방법에 능숙한 일본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이처럼 나선 듯 하다"며 "일본 역시 TSMC의 생산시설까지 구축하게 되면 자국 내 반도체 장비와 재료 업체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공급망을 만들 수 있게 되고,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재구축을 추진하는 데도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공급망 강화를 위해 TSMC 외에 미국 마이크론과도 협력에 나섰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일본에 공장 투자 확대와 장비·재료업체와의 제휴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또 올해 8월까지 3년간 70억 달러 가량을 일본에 투자한 데 이어 앞으로는 기술 개발을 위해 일본 업체들과 손잡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메흐로트라 CEO는 "차세대 1β(5세대) 제품의 실용화를 위해 일본 히로시마 공장 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일본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이 같은 분위기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주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TSMC가 반도체 공급망 확대를 위한 각국의 경쟁을 등에 업고 대만·미국에 이어 일본에까지 영역 확장에 나서자 속앓이를 하는 모양새다. TSMC는 최근 애리조나에 짓고 있는 파운드리 공장을 총 6개 라인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하며 미국의 환심을 샀고, 향후 3년간 1천억 달러(약 113조원)를 시설 구축에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최근 발표한 바 있다.
반면 삼성전자의 투자 움직임은 지지부진하다.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20조원 규모의 미국 내 파운드리 생산라인 투자를 공식화했지만 언제, 어디에, 어떻게 쓸 지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또 지난달 정부가 발표한 'K반도체' 전략에서 기존 밝혔던 투자금액인 133조원에서 171조원으로 늘리기로 했지만, 연평균 35조∼40조원을 쏟아붓는 TSMC에는 한참 못미친다는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 대만이 중국을 견제하는 한편 반도체를 둘러싼 밀월을 한층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설 자리가 애매해진 듯 하다"며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발표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중국 정부가 투자 압박을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난감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와 지속되는 사법리스크 등의 영향으로 대규모 투자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어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 확보에 점차 어려움을 겪는 분위기"라며 "이 같은 상황에서 TSMC가 반도체 소재 및 장치에 강점을 가진 일본 관련 기업과 결합해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면 삼성전자와 TSMC의 격차는 지금보다 더 벌어질 수밖에 없을 듯 하다"고 덧붙였다.
/장유미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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