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임기 막판에도 중국의 반도체 굴기(우뚝 섬)를 막기 위한 제재 강도를 더 올리면서 반도체 자급제률을 높이려던 중국 정부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됐다. 또 중국 정부가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키우던 주요 업체들도 심각한 유동성 위기로 어려움을 겪게 되며 선진국들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는 데 점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지난 3일(현지시간)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를 비롯한 중국해양석유(CNOOC), 중국국제전자상무중심그룹(CIECC), 중국건설기술(CCT) 등 4개 회사를 제재 대상에 올렸다. 중국군이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기업으로 간주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 국방부가 관리하는 중국군 연관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업은 총 35곳으로, 이들 기업과 거래할 경우 미국 측에 허가를 따로 받아야 한다.
이 같은 미국의 움직임에 SMIC와 중국 당국은 반발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미국이 국가 안보를 핑계로 중국 기업을 제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치적인 조치라고 비판했다. SMIC는 미국 제재와 관련한 입장 성명을 통해 "10나노 보다 작은 고품질 제품 연구개발에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단기적인 회사 운영과 금융에 대한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SMIC는 올해 4분기 파운드리 시장에서 매출 기준 점유율 4.3%를 기록하며 업계 5위에 오른 곳이다. 그 동안 중국 정부가 대규모 공적 자금을 직접 투자하고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 급성장했지만, 미국 정부의 강력한 제재로 사업 확대가 쉽지 않아진 상태다. 특히 이번 조치로 미국 투자자들이 내년 11월부터 SMIC 주식을 살 수 없게 돼 미국 자본을 투자 받기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SMIC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최전선에 있는 업체"라며 "중국은 반도체 자급률이 낮아 정부에서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자 나섰지만 미국의 제재로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화웨이를 제재하기 전까지는 화웨이의 반도체 설계 전문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SMIC의 가장 큰 고객이었다. 하지만 미국 행정부의 제재가 시작되며 생산 설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다 화웨이 자회사에 대한 모든 납품도 중지하는 등의 영향으로 SMIC의 4분기 매출액은 전분기 대비 11% 감소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 9월 SMIC에 특정 장비를 공급할 경우 수출 면허를 취득하도록 한 바 있다.
미국 상무부는 SMIC에 10나노미터(㎚·100만분의 1㎜) 이하의 반도체 생산 기술 접근 차단 원칙까지 이번에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SMIC는 14나노미터 공정까지만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상태로, 7나노 수준의 공정은 오는 2022년에야 가능할 것이란 예상이 나왔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업계에선 10나노미터 이하 제품 생산이 가능한 삼성전자와 TSMC에 수혜가 돌아갈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SMIC는 사실상 모든 원재료를 미국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어 기술 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 14나노미터를 뛰어 넘는 미세공정 추격도 힘들어지게 됐다"며 "당장 미국산 부품을 대체할 재료를 찾기 힘들어 매출의 25.8% 가량을 차지하는 55·65 나노 공정 제품의 생산에도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원재료 반도체 기술 자립을 노렸던 중국 역시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미국산 반도체 장비의 공급이 계속 금지될 경우 중국의 전반적인 파운드리 역량과 선단공정 개발은 차질을 빚게 돼 결국 고객사들의 이탈이 발생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기에 중국 '반도체 굴기' 상징이었던 칭화유니그룹 마저 최근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맞으면서 중국 당국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칭화유니그룹은 지난 11월 13억 위안(약 2천200억 원)의 채권을 갚지 못한 데 이어 지난 10일에도 만기가 도래한 4억5천만 달러(약 4천9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원금을 갚을 수 없다고 재차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다.
중국 칭화대가 지분 51%를 가지고 있는 이곳은 한 때 중국 반도체 핵심으로 주목 받았지만 단기간 내 무리한 투자와 외형 확장에 발목이 잡혀 위기에 빠졌다. 지난 4월 128단 낸드플래시 개발 소식을 전한 자회사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역시 모회사의 자금난 영향으로 메모리 사업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지난 9월 말 기준 칭화유니그룹 부채 규모는 528억 위안(약 8조9천496억 원)으로, 이 중 60%가 1년 미만 단기 채무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8월에는 중국 기업 최초로 7나노미터 반도체를 만들겠다고 나섰던 우한홍신반도체제조(HSMC)도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다. 지난 2017년 설립 이후 정부자금 153억 위안(약 2조5천600억 원)을 유치하고, TSMC 임직원을 다수 영입하는 등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에 나섰지만 계획대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않았던 탓이다.
이 외에도 중국 정부가 수조 원대 자금을 투입했거나 예정했던 화이안더화이, 난징더커마, 청두거신 등 여러 반도체 프로젝트들도 중단된 상태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총 1조7천억 위안(약 290조 원)을 투입해 충칭, 광둥, 산둥 등 중국 전역에서 50여 개의 대형 반도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큰 성과가 나오진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은 오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힘들어졌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15.6%로 2018년 16.5%에서 오히려 떨어졌다.
중국은 그 동안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 기업에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마련하는 등 여러 지원책을 마련했지만 선진국들과의 기술 격차는 여전히 큰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와 중앙처리장치(CPU) 같은 비메모리 반도체에서부터 D램과 낸드 등 메모리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반도체 제품을 직접 생산하지 못해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며 "이를 인지하고 있는 미국 정부가 중국의 반도체 약점을 파고들면서 계속 압박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한 전략 마련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지난 10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전체회의에선 미국 새 정부 역시 제재를 강화할 것이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반도체 등 핵심 기술 분야 자립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 미국의 집중 타깃이 된 화웨이도 상하이에 400억 위안(약 6조8천억 원)을 들여 반도체 연구개발센터를 세울 계획이다. 이곳에서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 성능 검증 등 모든 공정을 해결한다는 방침이다.
중국 최초로 메모리반도체를 독자 개발한 창신메모리 역시 지난 156억5천만 위안(약 2조6천억 원)의 정부 투자를 확보하며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정부가 그 동안 민간에 기업 경영을 맡기고 뒤에서 자금을 대는 방식으로 반도체 산업을 키웠지만, 미국 제재 등으로 전략에 차질을 빚고 있다"며 "이로 인해 최근에는 점차 국유화와 경영권 장악을 통해 반도체 산업을 직접 키우는 전략으로 반도체 굴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장유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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