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최근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잇따라 초대형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적극 뛰어들지 않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M&A로 경쟁력 강화에 나선 SK하이닉스 등 경쟁사들의 움직임과 대조적인 행보다. 이는 사법리스크에 발목이 잡힌 이재용 부회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시각이다.
5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 업계의 M&A 규모는 130조 원을 넘어섰다.
지난 9월 미국 GPU(그래픽처리장치) 회사인 엔비디아가 400억 달러(약 45조2천억 원)에 영국 ARM을 인수키로 했고, SK하이닉스도 최근 인텔의 낸드 사업부문을 90억 달러(약 10조1천600억 원)에 가져가기로 했다.
AMD도 경쟁업체인 자일링스를 350억 달러(약 39조4천억 원)에, 미국 아날로그 반도체 제조사 ADI는 맥심인터그레이티드를 200억 달러(25조 원)에 인수키로 계약을 맺었다. 미국 반도체 기업 마벨테크놀로지그룹도 네트워크 반도체 기업 인파이를 100억 달러(약 11조3천200억 원)에 품었다.
이처럼 반도체 업체들이 대규모 M&A에 나선 것은 최근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5세대이동통신(5G)·자율주행 등 IT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시장 생태계가 급변하면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으로 풀이된다. 각 업체들은 일단 각국 규제 당국의 승인 절차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업을 품어 빠르게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각 업체들이 M&A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10년 뒤 130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보이는 'AI(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것"이라며 "데이터 처리에 있어 대규모 학습과 추론, 연산 등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AI 반도체가 필수적으로, 관련 시장은 앞으로 폭발적으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 규모는 184억 달러(약 20조7천700억 원)로, 오는 2030년에는 1천179억 달러(약 133조1천1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성장성 때문에 각 기업들은 뒤늦게 기술 개발에 직접 뛰어들기 보다 이미 기술을 갖춘 기업을 품어 빠른 속도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실제로 최근 자일링스를 인수한 AMD의 경우 데이터센터 서버용 CPU 시장 점유율이 2% 수준에 불과한 데, 이번 자일링스 인수로 시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자일링스는 대용량 정보 처리 속도를 높이는 FPGA(firld-programmable gate array)에 특화된 곳으로, 업계 1위다.
FPGA는 반도체 위에 맞춤형 프로그램을 얹을 수 있는 구조로, 주로 자동차나 항공기, 통신기지국과 같은 곳에 사용됐으나 최근엔 인공지능 연산과 데이터센터, 통신 산업에 쓰이며 주목받고 있다. 이에 AMD는 자일링스 인수를 통해 인공지능칩 분야와 데이터센터 칩 분야에서 입지를 더 강화할 수 있게 됐다.
엔비디아도 ARM 인수로 AI 반도체 시장 경쟁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그 동안 AI를 활용한 자율주행·IoT(사물인터넷) 기술 개발에 주력해 왔던 만큼 AI 관련 반도체 설계에 특화된 ARM 인수로 IP(지식재산권) 포트폴리오를 확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SK하이닉스도 인텔 낸드 부문 인수로 SSD(Solid State Drive) 시장에서 빠르게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됐다. SK하이닉스는 옴디아 기준으로 지난 2분기 SSD 시장 점유율이 7.1%로 5위였으나, 2위인 인텔(29.6%)를 품으면서 36.7%로 올라서며 현재 1위인 삼성전자(34.1%)를 넘어설 수 있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데이터센터에서 초고속 정보처리가 가능한 AI 기능이 강조되면서 정보 입출력 속도가 빠른 SSD 활용성도 커지고 있다"며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부문 인수도 결국은 AI 반도체 시장을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다만 삼성전자는 대규모 M&A 경쟁에서 속 빠져 있다. 매 분기별로 조 단위 투자에는 나섰지만 대형 계약 소식을 전하는 경쟁사들과 달리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않고 있는 상태다. 한 때 자일링스, ARM 등의 인수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결국 경쟁사에 모두 뺏겼다.
일단 삼성전자는 올해 전체 시설 투자액 약 35조2천억 원 중 28조9천억 원을 반도체에 쏟아 부을 예정이나 기업 인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가 대규모 M&A에 나선 것도 지난 2016년 전장기업인 하만을 80억 달러(약 9조 원)에 인수한 이후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재계 관계자는 "지난 몇 년간 오너인 이 부회장의 부재로 대규모 투자에 섣불리 나서기 어려워진 탓에 삼성이 성장 동력을 잃었다"며 "일상적인 경영은 전문경영인(CEO)들이 이어갈 수 있지만, 대규모 시설투자나 인수합병(M&A) 등과 같은 전략적 결정과 글로벌 네트워킹 활동은 총수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재용 부회장을 둘러싸고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이 최근 재개된 데다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 재판까지 새롭게 시작되면서 삼성전자가 경영 활동에 상당히 위축된 상황"이라며 "본격적인 이 부회장 체제에서 삼성이 다시 인수·합병 빅딜에 뛰어날 가능성도 있지만, 앞으로 수년간 사법리스크가 더 이어질 것이란 점 때문에 적극 나서지 못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삼성은 대규모 M&A 대신 인재 영입에 적극 나서는 분위기다. 지난 6월 AI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세바스찬 승(승현준)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를 삼성전자 통합 연구조직인 삼성리서치 소장(사장)으로 영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삼성의 미국 R&D 조직이 AI 반도체 중 하나인 NPU(신경망처리장치·Neural Processing Unit) 관련 전문 개발자를 수시로 채용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NPU는 사람의 뇌처럼 학습하는 반도체로,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에 들어가 영상과 음성인식 등에 쓰이고 있다. 이 기술은 향후 자율주행 등으로도 확대될 것으로 업계에서 보고 있다.
일각에선 삼성전자가 M&A를 위한 실탄이 충분한 만큼 조만간 기업 인수에 공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관측했다. 특히 지난달 이 부회장이 네덜란드에 방문한 후 차량용 반도체 1위 기업인 NXP가 인수 후보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다만 이곳은 퀄컴이 지난 2018년 인수를 추진할 당시 제시했던 가격이 440억 달러(약 54조 원)로, 적극 추진하기엔 현금보유액 절반을 써야하는 삼성전자로선 부담이 큰 상태다. 삼성전자의 현금보유액은 올 상반기 기준 총 113조444억 원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선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확고부동한 선도기업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시스템반도체 쪽에선 상황이 다르다"며 "특히 삼성전자가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는 신경망처리장치(NPU), 자동차용 반도체와 같은 분야에선 쉽지 않은 경쟁을 치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급변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M&A 시도는 계속될 것이라는 점은 올해 연이은 초대형 빅딜이 이미 입증해주고 있다"며 "적기 투자 기회를 놓치면 순식간에 뒤처질 수 있는 반도체 산업 환경을 감안하면 삼성전자의 현 움직임은 국가적으로도 손해"라고 덧붙였다.
장유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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