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토요일 아침(7월 20일) 중국 내몽골 '엘렌하오터'를 출발, 남쪽 460킬로 떨어진 산시성 '대동'으로 향한다. 자동차를 타고 시베리아와 몽골고원 통과에 약 5500킬로를 지나왔다. 오늘부터 18일 동안 중국 영토와 실크로드 길을 통과해야 한다. 서안을 거쳐서 돈황, 투루판, 쿠차, 타클라마칸사막, 파미르고원을 통과할 것이다.
중국의 성(省)은 우리의 도(道)와는 전혀 다른 실질상 하나의 국가이다. 면적도 넓고, 인구수도 1억 명이 넘는 성(省)이 여러 곳이다. 중국 내몽골 자치주의 몽골족 인구는 약 400만 명으로 몽골공화국 인구(350만 명)보다 많다. 내몽골 전체 인구 중에서 한족이 80% 넘게 점유하여 몽골족은 소수이다.
청나라 시대부터 내몽골은 중국화 되어 신장 위구르족처럼 몽골족 독립 얘기는 없다. 우리는 중국 내몽골 고비사막을 지나서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7월의 고비사막 한낮 기온은 매우 높다. 광대한 사막의 하늘은 높고 푸르다. 사막 한 가운데 수십 킬로 길이 직선으로 뻗어 있다. 우리나라 봄철 황사(黃砂) 발원지를 지나고 있다.
가끔 비사막의 강풍이 자동차 유리 위에 모래를 뿌리며 스쳐 간다. 놀라운 것은 460킬로 긴 고비사막의 고속도로 양옆으로 무성한 '가로수 숲'이 조성되어 있다. 한 그루씩 심은 가로수가 아니라 넓은 폭(20미터, 30미터 폭)으로 '가로수 숲'을 조성해 놨다. 소나무, 포플러나무, 백양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도로 옆에 넓게 숲처럼 조성되어 있다.
멀리서 물을 끌고 와서 매일 물을 주어야 나무가 자라는데, 엄청난 노동력 투입이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톨게이트가 도로 한가운데에 설치되어 있다. 고속도로 통행료가 매우 비싸서 화물차는 주로 국도로 다니기 때문에 도로는 한가하다. 톨게이트 통과할 때 우리처럼 외국 국적 차는 절차가 복잡해서 최소한 5분, 10분 이상 대기한다. 감독관 조선족 류 씨의 중요한 역할은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고, 자동차 서류를 톨게이트 직원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한국 국적 차량을 처음 보는 중국 직원은 상급자에 물어보고, 휴대전화로 차량 앞면의 번호판 사진을 찍고, 우리들 여권을 확인한 다음 통과시키니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톨게이트마다 시간이 지체되니, 여행의 리듬이 끊기고, 짜증이 난다. 사방이 지평선으로 펼쳐져 있는 넓은 사막의 텅 빈 하늘에 새 한 마리 안 보인다. 아내는 생명체가 안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온이 떨어지는 밤이 되면 많은 야생 동물이 활동할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해' 아내에게 말했다가 핀잔을 듣는다. 몽골고원, 고비사막의 원시적 자연의 기(氣)를 흠뻑 받으며 달린다. 황량한 사막의 단순함과 광대함은 세속의 마음을 비우게 만들고, 우리도 자연의 일부로 순화되는 것 같다.
몇 시간씩 텅 빈 광야(廣野)를 무심(無心)하게 바라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아니하다. 내몽골 고비사막을 400킬로 이상 지나서 산서성 '대동' 가까이 왔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넓은 평야의 옥수수밭, 밀밭, 작은 농촌 촌락들이 자주 나타난다. 중국의 비옥한 화북평야의 초입이다.
고속도로가 좋아서 오후 4시 '대동(大同)'에 도착했다. 이곳부터 화북 지역 산서(山西)성이다. 태산을 기준으로 서(西)쪽은 산서성, 동(東)쪽은 산동성이다. 숙소로 가기 전에 '대동'시 외곽에 있는 태항산맥 항산의 '현공사'로 향한다. 오늘은 토요일 오후이다. 중국인 관람객이 인산인해이다. 드디어 14억 명 중국인 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뉴욕 타임즈'가 2010년 '세계에서 가장 기이하고 위험한 건물' 10선을 선정했다. 항산 '현공사'는 '피사의 사탑,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등과 함께 선정되어 유명해졌다. 1400년 전 선비족이 북위 시절에 세운 오래된 사찰이다. 토요일이라 중국인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절 목조 건물까지 못 올라가고,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만 보았다.
당시 이곳 '대동'은 흉노족 이후 몽골고원 강자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수도였다. 중국이 오랑캐라고 부르던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불교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돈황석굴, 맥적산석굴 등 북위 시대 조성된 것이다. 한족은 자기네 사상인 유교, 도교에 익숙한 반면, 중국을 점령한 이민족 왕족은 서역에서 온 외래종교 불교의 매력에 빠진 것이다.
부처는 '모든 것은 고통이고, 모든 것은 무상하다.'이다.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위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속세와 격리된 절에서 해탈을 구하는 승려들에게 유목민 왕들은 현세의 구복을 기도하기 위해 위험한 절벽에 절을 지은 것이다. '현공사'는 유불선(儒佛仙) "공자, 부처, 노자", 성인 세분을 모시고 있다. 위대한 세 성인을 한곳에 모시고 기원하면 복을 세 배 받을 것이라는 유목민들의 단순한 생각이 엿보인다.
절벽에 지탱하고 있는 현공사 나무 기둥은 30미터, 40미터의 가느다란 나무를 오랫동안 기름에 절여서 만들었다. 기둥이 낡으면, 수시로 기둥을 교체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위 절벽 하단의 빨간색 '장관(壯觀)' 글자는 당나라 시인 이태백(李太白)(701~762년)이 이곳에 놀러 와서 쓴 글씨라고 한다. 이태백은 시선(詩仙)으로 불리며, 두보와 함께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이다. 이태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음미해 보며, 잠시 여행의 피로를 잊는다.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태항산은 고사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전설이 있는 산이라고 한다. 아주 먼 옛날 태항산과 왕옥산 산속에 사는 90세 고인이 높은 산을 넘어 다니는 것이 불편해서 산을 평평하게 깎아서 길을 내기로 결심했다. 모든 사람이 노인의 계획에 대해 우습게 여기었다. 노인은 우공(愚公) 즉 어리석은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인은 동네 사람의 비웃음에 굴하지 아니하고, 내가 못 하면 아들, 손자, 손자의 손자 등 계속하면 언젠가 길을 낼 수 있다고 말하며 산을 깎기 시작했다.
태항산 산신령이 우공의 우직함에 감동해서 산을 옮겨 주었다는 전설이 이곳이라고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말을 '90세 우공'이 실천한 것이 아닐까?
기원전 로마의 명장 '케사르(율리우스 시저)'의 비단 사랑은 대단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이집트에서 수입한 면제품 옷을 입고 있을 때, '케사르'는 당시 최고급 사치품인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위신을 과시하였다. 당시 로마의 귀족 여인은 비단옷이 대유행이다.
속이 비치는 비단옷을 많이 입어서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은 풍기 문란을 걱정하며 여성의 비단옷 착용을 금지했으나 실효성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역사가는 로마 화폐의 1/3이 비단 수입에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비단이 어디서 오는지, 누에가 뽕잎을 먹고 만드는지를 몰랐다. 비단은 나무에서 따는 하얀 열매로 만드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한나라 무제시대 '장건'의 서역 탐험으로 실크로드가 생기기 전의 일이다. 어떻게 비단이 험난한 대륙을 지나서 로마제국 수도로 팔려 갈 수 있었을까? 기원전 몽골고원 강대국 흉노족은 한나라로부터 매년 수십만 필 비단, 은화, 곡식 등을 조공으로 받았다.
역사적 사건은 한나라 건국자 유방의 평성의 치욕을 뜻하는 '평성지치'(平成之恥)이다. 한 고조 유방은 항우를 패배시키고 한나라를 건국한 영웅이다. 기원전 200년 전 한 고조 유방은 30만 대군을 가지고 흉노족을 정벌하러 '평성'(현재의 대동)에 왔다. 당시 흉노족 선우(왕)는 '묵특' 선우로 아버지 '두만' 선우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흉노족 전성기 왕이다. 흉노족 왕 '묵특'은 4만 군사로 맞선다.
'묵특'의 유인 계에 빠진 유방은 포로가 될 위기에 빠졌다. 유방은 묵특선우의 부인에 뇌물을 바치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해서 목숨을 부지했다. 역사가들은 전략가 '한신'을 토사구팽시킨 유방이 스스로 전쟁 실력을 과신했다고 말한다. 이후 흉노족은 동쪽 몽골고원에서 서역 오아시스까지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패배한 유방은 흉노족과 형제지간(한나라가 형, 흉노가 아우) 화친을 맺게 된다. 유방은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화번공주' 시초)보내고, 매년 엄청난 양의 비단, 은화, 곡식 등 공물을 받치게 된다. 한나라는 흉노족에 바치는 수십만 필 비단을 '평화비용'으로 생각하고, 군사 양성 등 국방비보다 적게 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크로드가 생기기 전 한나라 왕실에서 흉노족에게 공물로 보낸 비단의 양은 매우 많았다. 흉노족 왕은 공물로 받은 비단을 몽골고원의 부족장들에게 나눠 준다. 흉노족의 일부 비단은 초원의 길을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로마제국까지 간 것이다. 흉노족 왕 '묵특'이 여태후(유방의 부인)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흉노족이 갑이고, 한나라는 을이다.
묵특은 유방이 죽고 미망인이 된 여태후에게 '혼자서 외롭게 사느니 내게 와서 함께 살자'는 편지를 보냈다. 여태후는 '나는 나이가 들어 이빨이 빠지고 늙어 갈 수가 없으니 왕은 양해 바란다.' 답신을 했다. 수치스럽지만 흉노족 왕 심기를 건들이지 않겠다 뜻이다.
한나라의 '화번공주' 중에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이 있다. '왕소군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날갯짓을 멈추고 땅에 떨어졌다.' 과장법이 유명하다. 화공이 뇌물을 안 준 왕소군 초상을 추하게 그려서 '화번공주'로 선발된 것인데, 떠나는 날 임금이 절세미인임을 알고, 초상화를 잘못 그린 화공을 처벌한 일화로 유명하다.
치욕적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다가 국력이 커진 한나라 5대 황제인 '한 무제' 시대 수세에서 공세로 나선다. 한나라는 대대적인 흉노족 정벌을 시작한 것이다. 한 무제는 흉노족에 원한이 있는 '월지족'을 찾아서 군사동맹을 체결하러 '장건'을 서역에 사신으로 보내고, 장건이 다녀온 길이 역사상 유명한 실크로드 개척의 시작이다.
실크로드는 몽골고원의 '흉노족' 때문에 개척된 것이다. 한나라 시대 중국은 비단 만드는 기술을 다른 나라로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서역 오아시스 국가 '호탄왕'에게 시집가는 중국 화번공주가 누에와 뽕나무 씨앗을 몰래 가지고 가서 서역에 전파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7세기경 동로마제국 수도사가 서역의 호탄에서 비단 만드는 방법을 몰래 훔쳐서 동로마제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2천년 전 최고의 사치품은 '실크'이다. 흉노족 귀족은 껄껄한 가죽옷 내피로 비단을 붙여서 옷을 해 입었다. 물물교환의 시대에 비단은 현재 달러처럼 국제적 화폐였다.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심산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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